메뉴 건너뛰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장년성경연구 지도자 교안
2021년 5월 23일 주일 용

 

번역 및 편집: 강 호길
hokilkahng@hotmail.com

 

 

12과  

 

 

자신의 정체를 밝혀주신 예수님                    

 

 

학습구절: 누가복음 24장 18 -31절    

 

성경진리:

예수님은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正體)를 밝혀주신다.        

 

주요교리: 성경      

모든 성경(聖經)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證言)이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중심(中心)이 되고 있다 (히 1: 1-2). .    

 

암송구절:  누가복음 24장 26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Did not the Messiah have to suffer these things
 and then enter his glory?”   

 

 

시작하는 글:  

 

수학(數學)은 마침내 어떤 공식(公式)이 맞아 떨어져서 문제(問題)가 풀리고 이해(理解)될 때까지 좌절(挫折)과 실망(失望)의 과정(過程)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도구(道具)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내려고 애쓰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그 방법을 찾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옛 기억을 되살리는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까지 그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일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수님은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바로 그 사실들을 밝혀주시며 가르쳐주신다.

 

어떤 일을 하거나 이해하는데 어려움과 문제가 많았는데,   번의 시도 끝에 갑자기 모든 것이 이해되거나 있게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배경설명

 

누가복음 24장 13절로부터 35절까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사건들 중의 하나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났다.

그 이야기를 여러 가지 측면(側面)에서 살펴보는 것은 그 사건을 입체적(立體的)인 관점에서 이해하게 도와준다.

첫째로, 본문(本文)은 그 사건이 일어나 위치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로, 약 7마일 정도 떨어진 곳으로 밝히고 있다.

그 곳은 당시의 시골 길로 걸어서 약 3 -4 시간이 소요되는 거리가 되고 있다.

둘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만난 사람은 “글로바”라는 한 제자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한 제자가 되고 있다.

그들 두 제자는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엠마오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으로 알고 예수님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라고 강권한 것을 보면, 그들은 엠마오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셋째로, 본문은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체류하[고 있던]” 장소(場所)를 밝혀주고 있다.

그들은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해 알려주었을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 (눅 24: 9 -10).

이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종교지도자들을 피해 한 장소에 숨어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가까운 제자들 중의 일원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열한 사도에 속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눅 24: 9).

넷째로, 이 이야기는 메시야가 이스라엘을 압제로부터 구해낼 것이라는 그들의 신념(信念)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바로 그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한다 (눅 24: 21).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의 왕국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이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실망감(失望感)과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다는 절망감(絶望感)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같은 상황(狀況) 속에서, 예수님은 “엠미오라 하는 마을”로 가는 그 두 제자와 합류하여 자신에 대한 성경(聖經)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는 메시야가 세상의 죄 때문에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하셨는지를 설명하였다.

예수님은 모세의 다섯 권의 책으로부터 시작하여 구약의 말씀을 사용하셨다.   

성경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과거에 예수님으로부터 그 말씀들을 듣고 배웠지만, 이제 그들의 이해력(理解力)은 십자가의 현실에 압도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마침내 예수님은 저녁 식사 때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주실 때 자신을 계시하셨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가 성경말씀을 열어 풀어주신 방법(방법)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자,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셨다.

두 제자는  곧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하였다.

 

 

학습구절 연구

 

제기된 많은 의문들과 질문들 (누가복음 24장 18 -24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혼란과 실망에 빠진 예수님의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들은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걸어가면서, 그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 하였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 하며 문의할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 요즘 거기서 된 일”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누가복음 24장 18 -21절

  •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 요즘 거기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박았느니라
  • 우리는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두 제자(弟子)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걸어 가면서 느꼈을 실망감(失望感)과 좌절(挫折感)을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일과 여인들이 그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돌아와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것으로 인해 크게 혼란스러워 하였다.

두 제자는 열한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이 있는 예루살렘에 머무르지 않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두 사람은 걸어가면서 그 모든 된 일을 문의하며 이야기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같이 걸어가고 있는 두 제자와 합류하여 동행하셨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토론하며 이야기하고 있느냐고 물으시자, 두 제자 중의 하나인 “글로바”가 이해(理解)할 수 없다는 어조(語調)와 질문형식으로 대답하였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면서, [지난] 며칠 동안에 거기서 일어난 일을 당신만 모른단 말입니까?” (표준새번역 눅 24: 18).  

글로바의 그 같은 대답에서는 그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한 주 동안 그를 따랐던 군중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 암시되고 있다.

“엠마오”가 글로바의 집이 있는 동네가 되고 있다면, 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제자들과 합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글로바가 무슨 뜻으로 그같이 말하고 있는지를 아셨지만, 그와 대화(對話)를 이어갈 목적(目的)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그들 두 제자가 이 단원의 본문 구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설명(說明)한 것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으며 어떻게 믿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이해(理解)할 수 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라는 말로 먼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밝힘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성(人間性)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믿었으며, 특별히 그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예수님을 위대한 교사나 심지어 선지자로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로는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교훈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는데,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막 1: 22).

     두 제자는 슬프게도 예수님을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사람들과 동일시(同一視)하였다.   

두 제자는 그같이 행한 종교 지도자들을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로 불렀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일종(一種)의 간접적(間接的)인 죄책감(罪責感)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 총독인 빌라도의 명령을 받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한 것은 로마 군인들이지만, 예수님을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게 한 것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인 것을 제자들은 알고 있었다 (눅 23: 24 -25).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그의 사명(使命)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징후는 그들이 실망하고 좌절한 원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들 제자들은 그들의 희망을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개념(槪念)위에다 두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생각하고 그같이 믿었다.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는 그들의 나라를 다른 나라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왕국을 다윗의 영광의 날로 회복시킬 것으로 생각하였다.                    

심지어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날까지도, 사도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라며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해방시켜 주시기를 기대하였다 (행 1: 6).

두 제자는 메시야를 잘못 이해하고 있던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문제(問題)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의 견해(見解)에 따르면, 예수님이 로마인들을 정복하는 대신에 그들의 손에 죽으셨기 때문에 그는 메시야가 아니었다.

 

누가복음 24장 22 -24절

  •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또한”이라는 말은 이전에 일어난 것도 이해(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될 뿐 아니라, 그 후에 일어난 일도 그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여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그 여자들은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무덤에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마 28: 1).    

두 제자는 말하기를,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라고 하였다.

그들 여자들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돌아와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는 말만 전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두 제자도 여자들이 전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눅 24: 11 참조).

     그들은 또한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여자들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갔던 일을 가리키는 말이 되고 있다 (눅 24: 12; 요 20: 3 -10).            

그러나 두 복음서의 기록들은 비어있는 무덤을 본 사도들조차도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 하셨다고 즉시 결론(結論)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기 전에 어떤 질문들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정직한 질문에 어떻게 응답 할 수 있었습니까?   

 

 

의문점들을 풀어주신 예수님 (누가복음 24장 25 -27절)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계신 예수님은 두 제자들이 그들의 현재의 상황을 이해(理解)하게 해주고 미래(未來)에 대한 희망(希望)을 갖게 해 주었을 구약의 예언의 말씀들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해 꾸짖으셨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구약성경이 어떻게 그를 메시야로 가리키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셨다.

 

누가복음 24장 25 -26절:

  •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고      

예수님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하시면서 그들의 “미련”을 탓하셨다.

여기서 “미련하다”는 말은 지적으로 모자라거나 어리석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은 분명(分明)한 것을 이해(理解)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들지 않는 마음의 상태(狀態)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하셨다.   

     제자(弟子)들로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의 필요성에 대해 그들에게 말씀 하셨을 때 주의(注意)를 기울여 들었어야 마땅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쳐주신 것들을 상기시켜주는 대신에, 자신에 대한 성경말씀들을 강조(强調)하며 상기(想起)시켜 주셨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의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다양한 예언의 말씀과 어떻게 부합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고난 받는 종” 혹은 “고난 받는 메시야”는 1세기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에게 전혀 인기 없는 개념(槪念)이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받는 메시야에 대해 나타내고 있던 반응은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냐 할 것”을 계시 하셨을 때 베드로가 나타내었던 것과 같은 것이 되고 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 이다”라고 하며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였다 (마 16: 22).

더 나아가서, 이사야 53장 같은 메시야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예언들은, 다른 사람 대신 받는 고난의 개념이 되고 있는 것이 확실한데, 메시야가 받는 고난이 아니라, 백성들이 당하며 겪는 고난(苦難)을 가리키는 것으로 종종 해석(解釋)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사명(사명)과 목적(목적)에 대한 진리를 여러 번에 걸쳐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기 때문에, 그들 두 제자도 그리스도가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였다.

만일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이 아니라, 사탄의 쉬운 길 혹은 지름길을 택하셨다면 (눅 4: 6 -7), 그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피하실 수는 있었겠지만, 그의 영광에는 들어가실 수 없었다.              

예수님의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는 하늘로 돌아 가시는 것을 포함한다(눅 9: 26).

그의 영광에는 또한 그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재림하시는 것이 포함되고 있다 (눅 21: 27).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얻게 되는 가장 큰 영광은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하셨다 (요 17: 3 -4).  

    

누가복음 24장 27절:

  •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그들 두 제자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그들과 함께,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말씀 여행을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을 그 부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성경이” 어떻게 그를 가리키고  있는 지를 자세히 설명(說明)해 주셨다.

설명하다”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용어(用語)에서 성경해석학을 뜻하는 ‘hermeneutics’라는 영어 단어가 생겨났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실]” 것인데,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메시야로, 자기보다 더 높은 분으로 받아 들여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신 18: 15-19).       

시편 기자 그 메시야가 겪에 될 고난과 죽음 그리고 그가 얻게 될 부활을 묘사하였다 (시 22편; 16: 8 -11).

이사야는 메시야가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과 (사 7: 14), 후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통에 찬 죽음을 죽게 될 것을 예언(豫言)하였다 (사 53: 4 -6).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찔림을 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슥 9 : 9; 12: 10).

메시야의 이야기는 창세기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전개(展開)되면서,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사건으로 절정(絶頂)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진리(眞理)를 말씀을 통해, 다시 말해서 말씀인 예수님을 통해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분명한 증거가 되고 있지만, 우리의 믿음의 기초(基礎)는 성경말씀이 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요 5: 39).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찾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할 때, 단순히 성경말씀에만 의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 (누가복음 24장 28 -31절)

 

엠마오 마을에 가까이 이르자, 두 제자는 동행자인 예수님에게 “때가 저물어가고” 있으니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라고 청하였다.

식사 때 예수님은 주인으로 두 사람을 섬겼다.

마침내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누가복음 24장 28 -29절:

  •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일행이 “마을에 가까이” 오자, 예수님은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셨다.

예수님이 그 같은 의도(意圖)를 나타내기 위해 정확히 어떻게 하셨는지는 분명(分明)치 않다.  

어쩌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큰 도로에서 벗어난 옆길로, 두 제자가 그 길로 들어갔을 때 예수님은 큰 도로로 계속 걸으셨을 수 있다.

어쨌든 두 제자는 밤에 걸어서 여행하는 것이 위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두 사람은 그들의 동행자이자 교사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두 제자는 두 가지 동기(動機)에서 예수님에게 엠마오에서 밤을 지내고 가시라고 “강권”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동기로는,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숙박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행자나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중요(重要)하게 여겼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이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에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레 19: 33 -34; 신 10: 18 -19).

더욱이,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기]” 때문에, 그들 두 사람은 동행자를 청하여 자기들의 집에서 묶게 해야 한다고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제자가 동행자에게 그 밤을 묵어가도록 초청한 또 다른 이유로는 그들이 길을 가면서 동행자부터 강한 감명(感銘)을 받은 일일 수 있다.

그는 두 제자에게 성경에서 그들이 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후에, 동행자가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되고 그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서로 말하기를,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하였다 (24: 34).

 

누가복음 24장 30 -31절:

  •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님은 실제로 손님이었지만, 자기를 초대한 주인인 제자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주인의 역할을 하셔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벳새다” 들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눅 9: 16), 그리고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을 때도 (눅 22: 19) 그같이 하셨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누가가 의도적(意圖적)으로 엠마오에서의 식사를 ‘주의 만찬’으로 행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엠마오에 있던 두 제자는 사도들이 아니었고 주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그들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눈이 밝아져”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실 때까지 사람들이 영적 문제를 보지 못했던 다른 경우들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민 22: 31, 왕하 6: 17).

그러므로, 그 말은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靈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누가 복음 24장 31절은 두 제자가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 보자 마자,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는지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그들은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고 하였다 (눅 24: 34).     

두 제자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덕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다 (눅 24: 35).   

 

말씀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기:

  •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찾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 하나님은 그의 진리(眞理)를 그의 말씀인 성경(聖經)을 통해 계시(啓示)하신다.
  • 성령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우신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깊이 탐구하도록 당신이 격려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 몇 가지를 든다면, 어떤 것들입니까?
만일 우리가 모든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찾도록 격려하며 지원하려고 한다면, 다 나은 안내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성경공부 반 모임에서, 성경말씀을 읽는 습관에 대해 이야기 하십시오.
반원들은 성경말씀을 규칙적으로 읽는 훈련을 더 잘 받을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며,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며 깨닫게 하는 일에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

 

 

 

  이 장년 성경연구 지도자 교재는 LifeWay에서 출간하여 보급하고 있는 Explore the Bible 교과과정의 학생용 한국어 교재를 가르치고 배우는데 도움이 되도록, 강 호길 목사가 LifeWay의 허락을 받아 영어 지도자 교재를 번역 및 편집한 것입니다.
그같이 허락한 LifeWay에 감사를 드립니다.
장년 성경연구 한국어 학생 교재는 LifeWay에서 주문하여, 장년 주일학교 시간에 혹은 목장이나 구역 모임에서 성경공부 교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98 지금은 무엇을 할 때인가? - 제 9과 - 2021년 8월 1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전도서 3장 1-15절 강호길 2021.07.31 322
297 무엇이 유익(有益)한가? - 제 1과 - 2021년 7월 25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전도서 1장 12 -15절; 2장 18 -26절 강호길 2021.07.18 320
296 믿음의 시험을 받은 욥 - 제 1과 - 2021년 6월 6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욥기 1장 8 -22절 강호길 2021.06.09 358
295 주님의 지상 명령 - 제 13과 - 2021년 5월 30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24장 36 -49절 강호길 2021.05.29 312
» 자신의 정체를 밝혀주신 예수님 - 제 12과 - 2021년 5월 23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24장 18 -31절 강호길 2021.05.24 253
293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 - 제 10과 - 2021년 5월 9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22장 54 -62절 강호길 2021.05.17 274
292 기꺼이 순종하신 예수님 - 제 9과 - 2021년 5월 2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22장 41 -53절 강호길 2021.05.07 293
291 기억하고 기념하는 믿음 - 제 8과 - 2021년 4월 25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22장 7 -20절 강호길 2021.04.27 120
290 머릿돌이 되시는 예수님 - 제 7과 - 2021년 4월 18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20장 9 -19절 강호길 2021.04.20 292223
289 복음이 필요한 죄인들은 누구인가? - 제 6과 - 2021년 4월 11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19장 1 -10절 강호길 2021.04.10 93
288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 제 5과 - 2021년 4월 4일 부활절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24장 1 -12절 강호길 2021.04.03 85
287 찬양과 예배를 받으신 예수님 - 제 4과 - 2021년 3월 28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19장 29-40절 강호길 2021.03.28 81
286 하나님이 귀하게 받으시는 것은? - 제 3과 - 2021년 3월 21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18장 9 -17절 강호길 2021.03.20 94
285 신자들은 무엇을 축하해야 하나? - 제 2과 - 2021년 3월 14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15장 20-32절 강호길 2021.03.13 92
284 누가 이웃인가? - 제 1과 - 2020년 3월 7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10장 25 -37절 강호길 2021.03.06 86
283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제자 - 제 13과 - 2021년 2월 28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9장 18 -23절 강호길 2021.02.27 823
282 은혜에 대한 사랑의 응답 - 제 12과 - 2021년 2월 21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7장 40 -50절 강호길 2021.02.20 79
281 예수님의 통치권 - 제 11과 - 2021년 2월 14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6장 1 -11절 강호길 2021.02.12 78
280 죄를 사하는 권세(權勢)가 있는 예수님 - 제 10과 - 2021년 2월 7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5장 17 -26절 강호길 2021.02.04 129776
279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 제 9과 - 2021년 1월 31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5장 4 -11, 27 -32절 1 강호길 2021.01.26 10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5 Nex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