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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9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제 3과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와 찬양을

 

학습구절: 사무엘 상 5장 1 -6절; 6장 11 -16절

성경진리:

하나님만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주요교리: [하나님]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된 신이시다.

암송구절: [사무엘 상 6장 20절]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And the man of Beth Shemesh asked,

“Who can stand in the presence of the Lord, the holy God?

To whom will the ark go up from here?”

 

시작하는 글:

사람들은 자신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의 상징이나 상징물이 모독을 받는 것을 보면 보통 분노감을 느끼며 화를 낸다.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애국자는 사람들이 자기가 사랑하며 아끼는 나라의 상징물인 국기가 불타는 것을 보면, 피가 역류(逆流)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나 성경이 불에 타는 것을 보거나 십자가가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는 것을 보면, 크게 슬퍼한다.

상징이나 상징물들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같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그들이 믿는 상징물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그 같은 상징물들이 공격을 당하는 것은 가장 강한 분노를 폭발시키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상징물이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이 점에 대해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기독교의 상징이 모욕적인 일을 당하는 것을 볼 때, 다른 어떤 특정 그룹이 느끼는 분노 감과 별로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감정에서 분출되는 분노일 수 있다.

어찌되었건, 우리도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가 좋아하는 운동 팀의 상징물을 더럽히거나 훼손시키는 것을 보면 분을 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진정으로 슬퍼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같은 모욕적인 일에 대해 주님께서 하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또한 기독교의 상징이나 상징물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바른 방법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혹시 지나치게 미신적인 방법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는지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배우게 될 언약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본문배경설명: 사무엘 4 1 – 7 17

솔로몬 왕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 건물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예배했던 장소는 전통적으로 “성막”으로 불렸던 회막이었다.

그 성막은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신 지침에 따라 모세가 지은 구조물이 되고 있다 (출 25: 25 -31; 36 -41).

성경은 회막의 완전한 역사를 제공해 주지 않고 있다.

그것은 종종 이동(移動)되곤 했지만,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는 그것은 곧 실로에다 영구적으로 고정시킨 구조물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성막에는 등대, 매일 떡을 진설 해 놓는 떡상, 및 분향단을 포함하여 성물들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성막에는 언약궤가 있었다.

그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증거 판들과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었다(출 16: 33; 출 25: 16; 히 9: 4).

그것은 하나님의 상징적인 보좌가 되었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막에 계시는 것을 나타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성막에는 고대 사람들이 그들의 성전에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그들의 신을 대표했던 우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언약궤는 또한 매년 행하는 속죄일 의식을 실행하는데 필요하였다.

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은 언약궤 위에다 뿌려서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였다 (레 16: 15).

언약궤는 하나님의 상징적인 보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속죄소도 되었다.

사무엘 상 4장은 어떻게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기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블레셋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패하게 되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보장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왔다.

엘리의 두 아들이자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도 함께 왔다.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 온 이스라엘 백성은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블레셋 사람들은 처음에 두려워 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하였다 (4: 11).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가지고 갔다.

실로에서 그 같은 패전의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구십팔 세였다.

예레미야 26장 절에 암시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이 그같이 패배를 당했을 때 실로에 있던 회막도 파괴된 것이 분명하다.

이후에, 이스라엘은 최소한 두 개의 다른 회막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에 있었고(삼상 21 -22장) 다른 하나는 “기브온에 있었다 (왕상 3: 4; 대하 1: 3).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언약궤는 없었다.

언약궤는, 여기저기로 옮겨 다닌 후에, 마침내 ‘야알”로 불려지기도 한 “기럇여림”으로 옮겨져 “이십 동안”이나 잊혀진 상태로 그곳에 오래 남아 있었다 (삼상 7: 1; 시 132: 6).    

언약궤는 마침내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삼하 6: 12 -17), 솔로몬은 성전을 짓기 전에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을 함께 모았다 (왕상 8: 1 4).

에벤에셀”이라는 이름은 북엔드처럼, 사무엘 상에 있는 이 이야기의 처음과 나중을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4장 1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비참한 싸움을 싸우기 전에 “에벤에셀”에 진을 치고 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7장1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을 완패시킨 후에, 사무엘이 한 돌을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으로 그것을

에벤에셀”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이 되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언약궤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실 것으로 잘못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사무엘의 전하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진정으로 도우셨고 이스라엘은 승리할 수 있었다.

그때 사무엘은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고 하였다.   

 

학습구절 연구

거룩하신 하나님 (사무엘 상 5장 1 -5절)

5: 1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5: 2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5: 3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려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5: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려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5: 5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5 1 -2: 이스라엘이 에벤에셀에서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 많은 사람이 죽고 도망을 칠 때,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뒤에 남겨두고 도망쳤던 것으로 보인다 (삼상 4: 10 -17).

특별히 제사장이자 엘리의 두 아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이 죽임을 당하자 언약궤는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상 4: 11).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승리의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에벤에셀에서 남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져 있던 곳인 “아스돗”으로 가지고 갔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를 “다곤의 신전”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다곤 신상 곁에다 놓았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다곤의 신전 안에, 그것도 다곤 신상 곁에다 놓은 것은, 그들이 믿고 섬기는 신이 이스라엘이 믿고 섬기는 신을 이기고

잡아온 것을 나타내었다.

다곤은 우상으로, 블레셋 사람들이 다산(多産)과 풍성한 수확을 위해 섬겼던 농경신(農耕神)들 중의 하나였다.

5 3 -5: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곤의 신상 곁에 놓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을 섬기게 된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다곤을

섬기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은 형세를 역전시키셨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서 가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려져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그것은 거룩하시고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신 여호와 하나님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일이 되었다.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자리에 세웠더니”라는 말은 또한 거짓 신들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배하는 우상들은 – 그것이 물질주의든 쾌락주의든 혹은 권세이든 간에, 그들을 신봉하는 자들을 도와줄 수 없다.

도리어 예배 자들이 우상들을 도와주고 받쳐주어야 한다.

거짓 신들은 주지 않고 취한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와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다시 엎드려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머리와 손 목이

끊어져 “문지방 ”에 놓여있었다.

다곤 신전의 제사장들은 그 사건의 본질과 뜻을 이해하려는 대신에, 다곤의 머리와 손이 놓여있던 “문지방”을 우상화 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자신들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문지방을 밟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한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언약궤가 참으로 거룩하다고 해서 그것이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갔을 때, 그들은 언약궤가 승리를 보장해 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 언약궤라는 우상을 신봉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크게 패하게 하시고 언약궤를 그들에게 빼앗기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징벌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궤는 특별하였다.

그 같은 사실은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승리의 전리품으로 취급하며 하나님을 모독했을 때 나타났다.

 

심판을 받음 (사무엘 5 6)  

5: 6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5 6: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승리의 전리품으로 잡아두고 있는 것으로 인해, “독한 종기”와 “재앙”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손이 그들을 엄하게 치신 결과였다.

공포에 젖은 블레셋 사람들은 궤를 아스돗에서 “가드로 옮겨 갔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로 옮겨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 하게 하셨다.

그래서 가드 성읍 사람들은 모두 악성 종양에 걸려 고통을 다하였다.

그러자 가드 사람들은 언약궤를 다시 “에그론”으로 보냈다.

에그론 사람들은 궤를 자기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죽이려 한다며 반대하였다.

중요한 점은 언약궤가 블레셋의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옮겨가면, 그 성읍은 즉시 악성 종양이 퍼져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궤를 승리의 전리품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를 심하게 징벌하셨다.

 

지시를 따라 행함  (사무엘 6 11 -12)

6: 11   여호와의 궤와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 위에 실으니

6: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6 11: 여호와의 궤가 “일곱 ”이나 블레셋 지방에 있는 동안에(6: 1),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자 마침내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하였다.

그들은 블레셋 모든 방백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고

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은 먼저 그들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에게 도움을 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보내려면 거저 보내지 말고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속건제로 드릴 제물로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에 따라 금으로 “독한 종기의 형상”과 “쥐의 형상”을 각각 다섯 개씩 만들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한번 더 시험해 보려고 하였다.

그들은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어미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언약궤와 속건 제물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게 하였는데, 송아지들은 떼어놓고 보냈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시험은 수레를 끄는 어미 소들이 모성애에 끌려 송아지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 그들이 겪은 재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우연히 당한 것이며, 만일 어미 소들이 그 같은 본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땅 쪽으로 가면 그 재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간주하기로 한 것이었다.

6 12: 그런데 놀랍게도, 그 어미 소들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갔다.

그같이 대로를 따라 갈 때, 어미 소들은 송아지들에게 젖을 먹이려고 돌아서거나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받고 있듯이, 벧세메스를 향해 똑바로 행하였다.

어미 소들이 계속해서 울고 있던 것을 보면, 그들이 송아지들을 찾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 성읍까지 가던 길을 계속 따라간 것을 보면, 그들이 본능에 이끌리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계속 따라왔던 블레셋 방백들은 이 모든 것을 직접 목격하고 확인하였다.

 

예배를 드림 (사무엘 6 13 -16)

6: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것을 기뻐하더니

6: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6: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궤와 함께 있는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위에 두매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6: 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6 13 -14: 언약궤가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온 곳은 “벧세메스”라는 성읍이었다.

벧세메스는 블레셋과의 접경이자 유다의 서남쪽 지역에 위치해 있던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약 14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때 벧세메스 사람들은 골짜기에서 밀을 거두어 들이고 있었다.

들에서 추수를 하고 있던 그들은 두 암소가 언약궤를 싫은 수레를 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눈을 눈을 들어 궤를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것과 같은 기쁨과 감사에 가득 찬 일이었다.   

멛세메스 사람들은 블레셋 군대의 말발굽 밑에 짓밟혀오고 있었다.

그런데  빼앗겼던 언약궤가 돌아 올 뿐 아니라, 블레셋의 통치자들인 방백들 마저 겸손한 자세로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벧세메스는 여호수아가 아론의 자손에게 준 땅들 중의 하나로, 그곳에는 아론의 자손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민 4: 4, 15; 수 21: 13 -16),

그들의 기쁨은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수레는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에 있는 큰 돌까지 와서 멈추어 섰다.

여호수아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6 15 -16: 당연하게, 레위 사람들이 수레에서 여호와의 궤와 금으로 만든 물건들이 든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다 놓았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잡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며 예배한 것이었다.

예배는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를 나타내며 믿음으로 응답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고 있다. 

블레셋 다섯 방백들은 벧세메스에서 일어난 일을 다 지켜보고 “에그론으로 돌아갔다.

 

말씀을 나의 삶에 적용하기:

우리가 하나님보다 먼저 혹은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실패와 파멸로 끝나게 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지시를 온전하게 따라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상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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