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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성경연구 지도자 교안
2021년 3월 7일 주일 용

 

번역 및 편집: 강 호길
hokilkahng@hotmail.com

 

1과  

 

 

누가 이웃인가?                  

 

 

학습구절: 누가복음 10장 25 -37절 

 

성경진리: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줌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주요교리: 기독교와 사회질서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일하여 고아들, 궁핍한 자들, 학대 받는 자들, 노인들, 무력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약 1: 27).     

 

암송구절:  누가복음 10장 27절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He answered,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시작하는 글:  

 

예수님의 가장 어려운 요구(要求) 중 하나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더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가?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사회적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지키는 정도의 것이라면,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命令)은 사회적 규범(規範)을 뛰어 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의 유형(類型)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하는 것과 같은 관심과 주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려는 마음과 희생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사랑의 명령(命令)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위한 자신들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줌으로 나타낸다.

 

당신은 누구를 당신의 이웃으로 여기십니까?
그들의 태도에 관계없이 그들을 사랑하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본문 배경설명

 

누가복음 10장 1절로부터 13장 21절까지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와 만나신 사건(事件)은, 이번 주의 학습구절(學習句節)이 되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이 그의 지상사역(地上使役)을 마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일어났다 (눅 9: 51).

예수님은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계셨고, 갈릴리에서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도 복음전파와 제자들을 준비(準備)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였다. 

이번 주의 본문 배경구절에 기록(記錄)되고 있는 각 사건들은 예루살렘에서 지상 사역을 끝마치시기 위한 준비과정(過程)과 그 대비책(對備策)들이 되고 있다.

     누가복음 10: 1 -24에는,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세우셔서 그가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지역으로”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일이 기록되고 있다.

그들을 보내시면서, 예수님은 “추수할 것이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라고 기도하라고 지시하셨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파송하셨을 때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지시하셨는데 반해 (마 10: 5 -6), 칠십 명의 제자들에게는 그 같은 제한을 두지 않으셨다.

선교 사명과 사역을 마치고, 이들 제자들은 기뻐하며 돌아와 그들이 목격 한 놀라운 이적들에 대해 예수님에게 보고(報告)하였다.

 누가복음 10: 25 -37에서,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영생(永生)을 얻는 방법에 대해 묻자, 율법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고 예수님은 되물으셨다.   

그 율법교사가 영생을 얻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전심(全心)으로 사랑하라는 신명기 6 장 5 절과 이웃을 자신같이 진실(眞實)하게 사랑하라는 레위기 19 장 18 절을 기본원칙(基本原則)으로 들자, 그를 칭찬하면서 “이를 행하면 살리라”고 하셨다.  

"이웃"의 의미에 대한 율법교사의 추가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번 주의 학습구절이 되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0: 38 -42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동생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들은 것을 칭찬하시고, 언니인 마르다에게도 그같은 우선순위를 갖도록 촉구하셨다 (눅 10: 42).

요한복음 12: 1 -3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사로의 누이들인 것을 밝혀주고 있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것을 살려주셨다 (요 11: 1 -44).

그들의 집은 예루살렘에서 약 2마일 떨어져 있던 동네인 베다니에 있었다.

     누가복음 11: 1 -13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중요한 원리(원리)들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신자의 기도에는 찬양과 간구, 및 고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더욱이 끈기 있는 기도의 중요성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 특별히 성령님을 선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될 필요성을 “구하라,” ”찾으라,” 그리고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셨다.   

     누가복음 11: 14 -26에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일을 기록하였다.

이를 목격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하였다.

예수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고 하시면서 귀신들이 자기들끼리 싸운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어이가 없는 일이라고 그 같은 비난을 반박하셨다.

진실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비로운 힘, 즉 악마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이,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해 주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 분명하다.

      

     누가복음 11: 27 -36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하시고, 계속 표적만을 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악한 세대”로 부르시면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청중들에게 이교도들인 구약의 니느웨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예언자인 “요나의 전도”를 들은 후에 회개하였던 사실을 상기시키시며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하셨다.

     누가복음 11: 37 -54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順從)은 변화(變化)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식(宗敎儀式)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가르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으셨다.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라는 일련의 말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그릇된 태도와 행위를 정죄하셨다.

     누가복음 12: 1 -34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차 임할 박해에 대해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핍박하는 자들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죽은 후에도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 심판자이다.

예수님은 또한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표준새번역 눅 12: 7).       

예수님은 또한 신자들이 땅의 보물을 신뢰하고 쌓아놓는 것에 대해 경고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함으로 하늘의 보물을 추구하도록 격려하셨다.

그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리”고 경고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12: 35 -59에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깨어 준비하고 있으며 섬기는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으라고 격려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신자의 삶을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종의 삶]”에다 비유하셨다 (12: 42).   

그는 가족들이 그를 두고 의견이 갈려 분쟁할 때가 올 것을 말씀해 주시고(12: 49 -53)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충성할 것을 촉구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일을 심판하실 때를 대비하기를 원하셨다.

     누가복음 13장 1 -21절에서, 예수님은 질문에 대답하시고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다 비유하셨다 (눅 13: 18 -21);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엄청나게 확장 될 것을 예언하셨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교회도 그같이 자라날 것이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아니하면 망하리라고 하시면서 죄에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고 (눅 13: 5) 안식일에 귀신 들려 앓으며 등 굽은 여자를 고쳐 주시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을 꾸짖으셨다.

 

 

학습구절 연구

 

예수님과 율법교사의 대화 (누가복음 10장 25 -29절)  

 

예수님은 그의 사역(事役) 중에 많은 질문(質問)을 받으셨다.

그들 중 어느 것도 이번 주의 학습구절인 본문에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물은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는 율법학자가 예수님에게 물은 질문은 모든 세대(世代)의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바른 대답이 요구되며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0장 25절

  •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는 예수님과 한 율법교사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 되고 있다 (눅 9: 51참조).

그 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으로 내려가셨다가 (눅 9: 52), 마침내 유대 땅으로 들어가셔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고]” 있는 길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눅 13: 22).

그 만남이 일어난 곳이 어느 장소가 되었건 간에, 누가가 그 여행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더 중요한 문제 점으로 삼은 것은 예수님께서 직면하신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로부터의 날로 거세지는 적대(敵對)의 방법(方法)이 되고 있다.  

     “율법교사”라는 말은 “서기관”이라는 용어와 동일한 유형의 유대인 율법 전문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막 12: 28; 눅 11: 53 참조).

누가는 일반적으로 이들 율법 교사들을 부정적(否定的)으로 묘사(描寫)하고 있다.

그들은 침례 요한의 침례와 메시지를 거부하였고 (눅 7: 30),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주의의 무거운 짐을 지웠으며 (눅 11: 45 -46), 사람들이 구원의 참 지식을 얻지 못하게 하였다.

예수님은 그같이 하는 그들을 질책(叱責)하시기를,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고 하셨다 (눅 11: 52).   

     누가는 그 율법교사의 질문의 동기(動機)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곧바로 밝혔다.

그러니까, 그 질문의 저의(底意)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험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유혹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율법교사는, 어쩌면 경멸적인 어조(語調)이긴 하지만,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르면서 그를 당혹스럽게 하거나 난처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

다른 한 편, 그 질문에는 예수님이 “영생”이라는 중요한 신학적(神學的) 진리(眞理)에 대해 바르게 잘 알고 있는지 여부(與否)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증명(證明)하려는 의도(意圖)가 담겨 있을 수 있다.

이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그의 질문(質問)은 실제로 개인적(個人的)인 성격(性格)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영생(永生)에 대한 교리(敎理)를 확실하게 잘 알고 있지만, 당시에 그것은 랍비들이 어떤 사람의 성경적 정통성을 평가하기 위한 시험 문제로 자신들끼리 혹은 가르치는 중에 일반적으로 논의(論議)하거나 묻는 주제(主題)가 되었다.

"영생”이라는 문구는 구약의 다니엘 12: 2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나중에 랍비 문학에서 그 개념(槪念)에 대한 논의의 출처(出處)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영생을 얻[다]”라는 생각은 죽음 이후에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죽음 후의 생명에 대해 유대인의 또 다른 종파인 사두개인들과 전혀 다른 견해(見解)를 갖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이 있는 것을 믿고 있었는데 반해, 사회 권력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정치적인 영향력이 더 강했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다 (마 22: 23 참조).    

 

누가복음 10장 26 -28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의 저의(底意)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질문을 율법교사에게 되돌려 물으심으로 응답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는 질문으로, 율법전문가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것을 그 율법교사가 밝히게 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계속해서 물으심으로, 그 질문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드셨다.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가 율법(律法)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말 할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밝히기를 원하셨다.

     그 율법교사는 신명기 6 장 5 절을 의역함으로 그의 전문성을 입증하였다.

신명기로부터의 이 인용문(引用文)은 신실한 유대인들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한 쉐마의 일부가 되고 있다(신 6: 5).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모든 족속에게 선포하는 선교적 사명을 위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었다 (출 6: 15; 창 12: 3).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는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 

그 같은 믿음의 반응(反應)은 모든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순종적인 행동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 같은 뜻이다(요 14: 15).

     율법교사가 레위기 19: 18의 후반 절에서 인용한 두 번째의 대답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관계는 단순히 어떤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 이상의 것이 되고 있다.

하나님은 단순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우리가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한 가지 시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에게 “네 대답이 옳도다”고 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같이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한 사람이 그 같은 일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고 자기가 오신 것은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마 5: 17).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우쳐 주시고 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율법교사로 하여금 자신의 노력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실 수 밖에 없었다. 

그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  

반면에, 성경은 가르치기를, 영생은 우리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을 고백하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엡 2: 8 -9).

 

누가복음 10장 29절

  •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예수님의 대답에 자기가 말한 대로 행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던 율법교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고 예수님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는 그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말해서 ‘자기를 정당화 시키려는 목적’으로 그 같은 질문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경우, 그는 그 같은 질문으로 명령의 범위를 좁혀 그 기준에 맞추도록 노력할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은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합니까”’라는 뜻이 될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오직 유대인만이 이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산상설교를 전하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마 5: 43 -44).

반면에, 그 율법교사는 그 질문으로 자신을 위한 변명의 구실을 만들려고 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난처한 입장에 빠뜨리려고 했을 수 있다.

 

사람들은 왜 선한 일이나 종교적인 일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나 전술을 사용합니까?   

 

비유 이야기 (누가복음 10장 30 -35절)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다.

이 비유는 누가 내 이웃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느냐는 더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고 있다.  

 

누가복음 10장 30 -32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유대인들은 그들의 이웃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더 넓고 큰 요구조건(要求條件)을 이해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한 율법교사가 제기한 질문을 피하지 않으시고 비유의 이야기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비유를 사용하여 듣는 사람들을 설득(說得)시키시고 이해하기 어려운 영적(靈的) 진리(眞理)와 교훈(敎訓)들을 쉽게 이해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여행하고 있는 어떤 한 사람을 묘사하셨다.  

예수님은 여행자의 인종적(人種的) 배경을 밝히지 않았다.

청취자들이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그 여행자도 유대인으로 추정(推定)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것은 “내려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예루살렘은 고지대(高地帶)에 지어져 있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의 북동쪽에 있었지만, 그것은 해수면보다 약 800 피트 낮은 곳이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약 20마일 정도의 그 길은 산악 바위 사이에 나있는 것으로, 강도들이 숨어있다가 지나가는 여행자를 강탈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비유에 등장하는 불운한 그 여행자는 그 길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물건을 다 강탈당하였다.               

강도들”은 여행자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상태가 된]것을 버[려두]고” 가버렸다.

그 여행자는,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죽을지도 모르는 매우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이 비극적인 장면을 마주치게 된 세 사람을 소개하신다.

첫 번째는 한 “제사장”이었다.

그 제사장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렸다.

본문이 그를 “내려가다가”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오고 있었다.

그 제사장은 상처를 받은 사람을 도와주는 대신, “피하여 지나가” 버렸다.       

우리는 그 제사장이 강도 만난 여행자를 피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길 건너편으로 지나갔다고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제사장의 동기를 추측할 수 있지만, 비유는 단지 그의 행동만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의 동기(動機)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의 개인적인 이해관계(利害關係)가 부상당한 사람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던 걱정이나 염려보다 더 중요하고 컸던 것이다.

     비유 이야기의 다음 부분은 한 레위인을 소개한다.

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었다.

레위인들은 같은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지만, 아론의 후손은 아니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일을 주도(主導)하였다.

레위인들은 성전 관리와 제사장들을 돕는 일을 하였다.

그들 두 그룹은 모두 그들이 맡은 직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요구조건으로, 의식적으로 정결함을 유지하는데 매우 관심이 많았다.

     “또 이와 같이”라는 말은 그 레위인도 예루살렘에서 오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성전에서 섬기기 위해 의식적으로 자신의 정결을 유지하는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비유 이야기는, 제사장의 경우처럼 아무 설명이 없이,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라고 기술하고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둘 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렸다.

그들은 상처를 받아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다.         

 

누가복음 10장 33 -35절:

  •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예수님께서 그의 비유 이야기에서 소개하시고 있는 세 번째의 인물은 “사마리아 사람”이다.  

헬라어 본문에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용어는 강조(强調)하기 위해 이 구절의 첫 번째 단어(單語)로 나오고 있다.

그것은 유대교의 종교 엘리트와 갈릴리와 유대 사이의 지역에 살면서 유대인들에게 멸시의 대상이 되었던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극명한 대조(對照)를 강조하는 방법이 되고 있다.   

많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지역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비유 이야기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일부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 지역을 여행하였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 장소에 이르게 되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달리,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가까이 가서 “보[았]”을 뿐 아니라, 그를 “불쌍히” 여겼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들이 따라 하기를 힘쓰는 하나님의 속성(屬性)이 되고 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다른 사람과 "함께 고통을 겪다"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동정심 이상의 것이 되고 있다.

사마리아인의 경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알지 못하는데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즉각적인 도움을 베풀어준 사랑의 표현(表現)이 되고 있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사용하여 피해자에게 즉각적인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주었다.

이 설명은 피해자가 구타로 인해 뼈가 부러지고 심한 상처와 출혈을 겪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 시점에서, 사마리아인은 그만큼 했으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변명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

그 사마리아인은 짐승을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당나귀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강도사건은 인구 밀집 지역에서 떨어진 외진 곳에서 일어났을 것이므로, “주막”까지 가려면 시간적인 투지가 필요하였다.

    “주막”에 도착하자, 그 사마리아 사람은 부상당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돌보아” 주었다.  

그때까지, 사마리아인은 여행을 중단하고, 안전의 위협을 받았고, 도움을 제공하였으며, 계속해서 그 사람을 돌보아 주었다.

이 비유 이야기는 피해자가, 다른 상황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며, 도와주는 것은 고사하고 말도 걸지 않았을, 유대인이 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같은 인종간(人種間)의 긴장상태는 사마리아인의 동정적인 행동을 더욱 놀랍게 만들고 있다.

그같이 돌보아주는 사마리아인의 일은 “그 이튿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상처 난 사람을 밤새도록 돌보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마리안인은 사업차 여행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일을 마치기 위하여 여행길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크게 부상당한 사람을 그 상태로 놔두고 떠날 수 없었다.

그 이튿날” 그는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부탁하였다.

두 데나리온은 당시 일반 일꾼의 약 이틀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는 주막 주인에게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하였다.  

"내가 돌아올 때에"라는 말은 사마리아인이 자신은 부상당한 사람을 충분하게 돌보아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곧 돌아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믿지 않는 일반 사람들이 신자들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도전의 말씀 (누가복음 10장 36 -37절)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는 말로 예수님에게 "이웃"을 정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의무에 대한 자신의 제한된 견해를 정당화하기를 바랐다.

예수님은 그로 하여금 그가 기대하거나 원하지 않았던 이웃에 대한 대답과 견해를 피력하게 하셨다.    

 

누가복음 10장 36 -37절:

  •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세 사람에게 “강도 만난 자”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오직 한 사람만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 주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말씀으로, 율법교사가 피할 수 없는 간단한 질문을 하셨다.

이웃이 된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사는 것, 같은 혈통을 나누고 있는 것, 혹은 공통적인 관심사를 갖고 있는 것 이상이 것이 되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단순히 이웃이라고 주장 할 수 없다.

참 이웃이 되는 일에는 진실한 사랑을 나타내는 행동이 요구되고 있다.

     비유 이야기의 상황을 감안할 때, 그 율법교사는 “이웃”을 “자비를 베푼 자”로 밝힐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사마리아인이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인종적이거나 민족적인 차이, 종교적인 차이, 또는 편견이나 개인적 적대감 등을 제쳐 놀은 점에서, 그 사마리아인이 이웃이 된다고 말했어야 되었음에도, 그 율법교사는 실제로 그같이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비”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출 34: 6 -7 참조),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을 속죄하시는 것과 관계되고 있다.

지성소 안에 있던 언약궤의 순금 뚜껑은 “속죄소”로 번역되고 있는데 (출 25: 17 -22), 실제로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寶座)를 상징하며 ‘자비의 보좌’(mercy seat)가 되고 있다.

자비는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랑의 행위로 나타난 것이다.

단순히 우리가 이웃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웃이 되는 것에는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돌보는 행동이 요구되고 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그 율법교사가 하나님의 위대한 계명의 요구조건들을 알고 그것들을 온전히 행하며 지킬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다.

율법교사는 율법의 요구조건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바르게 식별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종교적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입증된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이웃들, 즉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기대하신다.

실제로,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공과를 쌓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지 않는다.

우리가 평생 동안 선행을 쌓는다 할지라도 죄 값을 다 치를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영생이라는 새 삶을 누리고 있다는 두 가지 주요한 증거이다.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는 당신에게 어떤 도전이 되었습니까?

이번 주에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말씀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기:

  • 예수님은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우리의 시도들을 드러내 주신다.    
  •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 예수님은 신자들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기대하신다.      

 

당신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합니까?
그러한 행동들을 당신에게 드러내 보여주시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에 근거하여 행동 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당신의 반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편견이 없이 열려있는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는 몇 가지 실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포용성을 높이기 위해 당신의 반이 바꾸어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삶 속에서 지금 당장 "선한 사마리아인"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들을 돕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장년 성경연구 지도자 교재는 LifeWay에서 출간하여 보급하고 있는 Explore the Bible 교과과정의 학생용 한국어 교재를 가르치고 배우는데 도움이 되도록, 강 호길 목사가 LifeWay의 허락을 받아 영어 지도자 교재를 번역 및 편집한 것입니다.
그같이 허락한 LifeWay에 감사를 드립니다.
장년 성경연구 한국어 학생 교재는 LifeWay에서 주문하여, 장년 주일학교 시간에 혹은 목장이나 구역 모임에서 성경공부 교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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