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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성경연구 지도자 교안
2021년 4월 18일 주일 용

 

번역 및 편집: 강 호길
hokilkahng@hotmail.com

 

7과  

 

 

머릿돌이 되시는 예수님                   

 

 

학습구절: 누가복음 20장 9 -19절    

 

성경진리: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주요교리: 인간    

인간은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자마자,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정죄를 받는다 (롬 3: 23).     

 

 

암송구절:  누가복음 20장 17절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Jesus looked directly at them and asked,

“Then what is the meaning of that which is written”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ornerstone’?  

 

 

시작하는 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경고나 지시를 무시하고 그 결과에 직면한 경험이 있다. 

하나님의 경고와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일에는 훨씬 더 큰 결과가 따른다.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복음을 무시하면 심판을 받게 되지만, 복음의 가르침 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누구든지 죄 사함 과 구원을 받는다.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들의 충고(忠告) 지혜(智慧) 무시했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이 그들을 무시하게 요인(要因) 무엇입니까?

 

 

본문 배경설명

 

누가복음 20장 1절로부터 21장 38절까지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대립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일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갈등(葛藤)과 대립(對立)을 더욱 격화(激化)시키고 가속화(加速化) 시킨 것은 확실하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돈 바꾸는 사람들과 짐승을 파는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들은 (마 21: 12 -17; 막 11: 15 -19; 눅 19: 45 -48; 요 2: 13 -22) 그가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직후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누가와 마태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성전경내(聖殿境內)에 들어가셔서 상인(商人)들을 쫓아 내셨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두 복음서의 어느 것도 예수님께서 그같이 하신 시간 대를 밝히지 않고 있다.

    마가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후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들러보시고” 날이 저물자 주무시기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고 말하고 있다 (막 11: 11).

다음날 아침에, 예수님은 성전으로 돌아오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를 내 쫓으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사 56: 7)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고 하셨다.    

그 사건(事件)을 차례대로 바르게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감정적 충동(衝動)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적이고도 계획적인 일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후에,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이 대립(對立)과 충돌(衝突)을 일으킨 일들이 계속(繼續) 일어났다.

     첫 번째는 그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그같이 행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주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며 예수님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며 도전한 일이 되고 있다 (20: 2).

예수님은 역 질문(逆 質問)으로,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고 물었다 (눅 20: 4).

예수님은 그들 종교지도자들이 그 질문에 대답하면, 자기도 말해주겠다고 하셨다.

그들은 서로 의논(議論)하기를, “만일 하늘로부터라고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하고,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였다 (눅 20: 5 -7).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 (눅 20: 8).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의 말씀으로, 성전과 나라에 대한 청지기 직분을 오용(誤用)한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선언하셨다.

    두 번째는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라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종교지도자들의 간계가 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을 하시든,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질문이 되고 있다.

옳다”고 하면, 그것은 외국 침략세력에게 세금을 바치라는 것으로 유대 백성들이 싫어하는 대답이 되었다.

옳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로마정부에 반역하는 일이 되었다.

예수님은 당시에 통용되고 있던 동전인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신 후,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명언을 남기시고 종교지도자들의 계략과 시도를 좌절시키셨다 (눅 20: 25).

     세 번째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시도한 일과 예수님께서 그들의 시도를 역전(逆轉)시키신 일이 되고 있다 (눅 20: 27 -40).

그들이 제기한 것은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것으로(신 25: 5), 한 남자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되고 있다.

사두개인들은 그같이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았던 일곱 형제에 대해 말하였다.

그들 일곱 형제는 다 죽게 되었고, 마침내 그 여인도 자식이 없이 죽었다.

그들의 질문인즉, 마지막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일곱 형제 중에서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단언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하셨다 (눅 20: 38).

예수님께서 밝혀주신 것은 결혼이란 이 세상에서의 제도이지, 오는 세상의 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메시야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셨다.

그 모든 사건들은 메시야의 권세에 대한 그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해주는 일이 되었다.

그 같은 권세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위선을 책망하셨다.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위선을 진정한 예배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헌금으로 드린 과부의 단순한 믿음과 대조(對照)시키셨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세상의 종말과 그의 재림에 대해 예언하셨다 (눅 21: 5 -38).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정복을 당할 것이며, 나라들이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전쟁이 벌어 질 것이다.

그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하신다 (눅 21: 10 -11).  

많은 사람들이 거짓 메시야들과 혼란스러운 상황에 미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인자가 권세와 영광으로 재림할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항상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며 그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학습구절 연구

 

보냄을 받은 종들 (누가복음 20장 9 -12절)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은 성전 뜰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날마다 성전 뜰에서 가르치셨다 (눅 19: 45 – 48).

예루살렘은 70 명의 지도자들과 대제사장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의결기구인 공회 혹은 산헤드린의 근거지(根據地)가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적대(敵對)하며 사람들에게 불신(不信)을 당하게 하거나 그를 제거할 방법(方法)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對應)으로, 예수님께서는 한 비유의 말씀으로 그들 종교 지도자들의 적대감을 정죄하셨다.

 

누가복음 20장 9절

  • 그가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예수님의 포도원의 비유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認定)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강한 반응인 동시에 정죄의 방법이 되고 있다.

예수님을 시기하며 질투하는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군중들의 인기를 얻으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은 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기]”까지 하였다.

예수님은 단지 자신의 권위(權威)를 지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은 지도자들로서 이스라엘에서 오랜 문제의 1차적인 책임이 있었다.

이들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성실하고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도하며 인도하는 대신에, 지위와 영향력을 남용하여 자신들의 힘과 명성, 그리고 특권과 재물을 축적하는데 사용하였다.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은 이들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청지기 직분을 그릇되게 사용(使用)하고 오용(誤用)한 것을 꾸중하시며 비난(非難)하셨다.

그 포도원의 비유는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동안 체류한 이야기이다.

주후 1 세기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농장 주인이 먼 곳에 살면서 농장을 경영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주인은 소작인들과 계약을 맺어 포도원을 가꾸게 하였는데, 포도나무들이 자라나 열매를 맺기까지는 4년 정도가 걸렸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특별히 구약성경(舊約聖經)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사야 5 장 1 -7절에 나오는 비슷한 비유를 즉시 상기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 구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서 좋은 포도를 수확하기를 바라고 “극상품 포도나무”들을 갖다 심으시고 정성을 다해 조심스럽게 가꾸신 포도원에다 비유하였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종국에 가서 발견하게 된 것은 맛이 쓴 “들포도”가 열린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와 이사야 선지자의 비유 사이의 다른 것은 문제 혹은 갈등이 하나님과 포도원인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돌볼 책임이 있는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것에 되고 있는 점이다.

포도원 주인은 “타국에 가서 오래 [동안]” 있었다.

흥미 있는 것은, 많은 성경주석자들이 이 기간을 구약 시대로 보고 아들이 보냄을 받은 시기를 신약 시대가 시작한 때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20장 10 -12절

  •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 지라

소작인(小作人)들이 포도를 수확할 때가 되자,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 소출 얼마를” 소작료로 받아올 목적(目的)으로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응당 받을 권리가 있는 소작료를 받아오기 위해 처음 “한 종”을 보냈을 때, 포도원 주인(主人)은 소작인들로부터 어떤 저항이 있을 것을 예상(豫想)하지 못한 것이 분명(分明)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농부들[은] 종을 몹시 때리고 [빈 손으로] 거저 보내었[다].”

    그러자, 주인은 두 번째로 다른 종을 보내어 자신에게 속한 것을 받아오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첫 번째의 종처럼, 소작인들은 두 번째 종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다.]”

포도원 주인은 다시 “ 번째 종을 [냈는데]”, 그들은 “ 종도 상하게 하고 [았다.]

주인이 세 명의 종을 계속 보낸 것은 주인의 극도의 인내심을 보여주는 일이 되고 있다.

포도원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그들이 행한 일을 회개하고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機會)를 주려고 하였다.

다른 한편, 소작인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계속 학대한 일은 회개하지 않는 그들의 사악함과 고집을 보여준다.

포도원의 비유에 나오는 종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을, 회개하도록 부르시기 위하여 보내신 수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상징하고 있다.   

  

보냄을 받은 아들 (누가복음 20장 13 -16절 상)

 

포도원 비유의 이야기는 주인이 소작인(小作人)들로부터 소작료를 받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는 것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렇지만, 사악한 소작인들은 더욱 악하게 굴어,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그 유산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자고 하였다.   

 

누가복음 20장 13 -14절:

  •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주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kyrios라는 단어로, “여호와” 혹은 “주”를 뜻하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다.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과 하나님을 연관시키려는 뜻으로, 그 용어(用語)를 의도적(意圖的)으로 사용하셨을 수 있다.

그러므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다.

어찌할까” 혹은 “무엇을 할까”라는 문구는 또 다른 비유에서도 내려야 할 중요한 결정(決定)을 알리기 위해 나오는 말이 되고 있다 (눅12: 17; 16: 3 참조).

     이 비유의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주인이 군사들을 고용하여 계약을 집행(執行)하고, 동시에 종들을 학대한 사악한 소작인들을 처벌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그같이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하였다.

주인은 소작인들이 종들에게는 악하게 했지만, 자기 아들은 “존대하리라” 생각하였다.   

반면에, 포도원주인이 그같이 한 일에서는 주인의 극도의 인내심(忍耐心)과 자비(慈悲)가 나타나고 있다.

     소작농들은 주인이 바라던 대로 응답(應答)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존대”(尊待)할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도리어 그들은 주인 아들 안에서 그들의 악한 계획(計劃)을 진척(進陟)시킬 수 있는 기회를 보았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라는 말은 예수님의 원수들이 나중에 그를 붙잡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을 예시(豫示)해 주는 일이 될 수 있다.

      소작인 농부들은 “아들”을 보자 서로 말하기를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고 하였다.  

성경 주석자들은 주인의 아들이 죽으면 그의 “유산”이 어떻게 소작인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그들 농부들이 생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을 해오고 있다.

그들은 탐욕과 충동 심에 이끌린 나머지 허황한 생각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누가복음 20장 15절:

  •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소작인들은 그들의 악한 생각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다.]

그 말은 실제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며칠 후에 겪으실 고난과 십자가의 처형을 예고해 주는 것이 되고 있다.

종들을 때리고 능욕하는 것에서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비유가 점점 더 난폭해지고 있는 것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찾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경고가 되었어야 마땅하였다.

예수님은 실제로 자신이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으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를 듣는 모든 사람이 대답하도록 도전(挑戰)하는 질문(質問)이 되고 있다.

도덕적인 응답은 악한 소작인들이 악행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공의와 이치에 맞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한 정당성은 없었다.

다시 한번, 이것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악한 계획에 대해 종교 지도자들을 깨우려는 시도가 되었다.

    

누가복음 20장 16절상:

  •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곧장 그 자신이 비유에서 제시하신 질문(質問)에 대한 대답(對答)을 직접 하셨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 포도원 주인이 “와서” 그의 종들을 학대하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세 부분(部分)이 되고 있다.     

     첫째 부분은 포도원 주인이 올 것이라는 불길한 경고가 되고 있다.

아마도, 그들 소작인들은 그들의 주인(主人)이 그때까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직접(直接)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둘째 부분은 주인이 악한 소작인들을 “진멸[할 것]”이라는 직설적인 경고가 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인이 와서 공의(公義)를 시행할 것이라는 것을 과소평가(過小評價)하였다.

     셋째 부분은 포도원 주인이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는 흥미(興味)로운 결론(結論)이 되고 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셨다.

어쩌면 그 말은 이방인들을 복음사역에 포함시키는 것을 예표(豫表)하는 일을 가리킬 수 있다.

사도 행전에서, 누가는 새 언약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과 복음 선교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을 강조하였다 (행 13: 48; 15: 6-11).

 

포도원 주인이 자기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낸 것은 아버지의 성품에 대해 무엇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까?

이 비유는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건축자들에게 거절당한 머릿돌 (누가복음 20장 16하 -19절)

 

듣는 사람들이 비유의 결론(結論)에 충격(衝擊)과 믿을 수 없다는 반응(反應)을 보였을 때, 예수님은 그 순간을 그 비유와 시편 118편 22절과 메시야를 서로 연결시켜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기회(機會)로 삼으셨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구원계획(救援計劃)의 “머릿 돌”로 거절한 것은 그들의 심판(審判)과 종말(終末)을 확정(確定) 짓는 일이 되었다.

 

누가복음 20장 16절 하:

  •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지어다 하거늘   

누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비유말씀을 듣고 “그렇게 되지 말지어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記錄)하였는데, 그 말은 일반 군중들이 한 말이 될 수도 있고, 예수님을 적대(敵對)했던 종교지도자들이 한 말을 뜻할 수도 있다.

만일 그 말이 일반 군중들이 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렇게 되지 말지어다”라는 말은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있다.  

만일 그같이 말한 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라면, 그것은 그들 종교지도자들이 정죄를 받고 포도원(왕국)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한 말이 되고 있다.  

      이 비유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적용(適用)되는 구체적(具體的)인 면과 일반 대중에게 적용(適用)되는 일반적(一般的)인 면의 양면성(兩面性)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거절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고 정죄하실 것이다.

일반적인 적용(適用)으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 아들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누가복음 20장 17 -18절:

  •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20장 9절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는 말로 포도원의 비유를 시작하였는데,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라고 한 20장 17절의 말을 보면 예수님께서 계속 일반 백성들을 보시며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예언하신 말씀이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지 말지어다”라는 강한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의 그 같은 반응(反應)에 대해, 예수님은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셔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고 한 말의 뜻을 생각해 보라고 도전하셨다.

     이 인용구절(引用句節)을 비유에 적용할 때, 이야기의 아들은 집을 짓는 사람들이 거절한 돌을 상징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유의 아들과 성경의 돌은 똑같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거절(拒絶)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건물의 다른 모든 부분을 하나로 붙들어 매주며, 묶어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 “머릿돌”이 되신다.

     예수님은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메시야를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지게 하며 부러지게 하는 “걸림돌”과 “함정과 올무"로 묘사한 이사야 8장 14 -15 절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는 둘째 줄은 히브리 시 문학의 병행표현법(竝行表現法)의 한 예가 될 수 있다.

다른 언어(言語)를 사용하여 첫 번째 줄을 반복함으로써, 두 번째 진술은 의미(意味)를 더 강하고 분명하게 해 준다.

전체적(全體的)인 의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强調)한다.

 

누가복음 20장 19절:

  •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비유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을지라도, 비유의 이중적인 적용으로 인하여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즉시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렇지만, “백성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상황에서 감히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요 3: 17 -18).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딤전 2: 4).

 

"건축 자들"은 왜 머릿돌인 예수님을 거절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의 머릿돌이 되시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말씀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기:

  • 하나님의 잘못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다.
  •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생활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낸다.     
  •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      

 

오늘날 당신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로 지원하고 있는지를 평가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보내신 사역자들을 더 잘 지원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반원들과 함께, 당신의 영향권 안에 있으면서도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에게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을 위해 책임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까?

 

 

 

이 장년 성경연구 지도자 교재는 LifeWay에서 출간하여 보급하고 있는 Explore the Bible 교과과정의 학생용 한국어 교재를 가르치고 배우는데 도움이 되도록, 강 호길 목사가 LifeWay의 허락을 받아 영어 지도자 교재를 번역 및 편집한 것입니다.
그같이 허락한 LifeWay에 감사를 드립니다.
장년 성경연구 한국어 학생 교재는 LifeWay에서 주문하여, 장년 주일학교 시간에 혹은 목장이나 구역 모임에서 성경공부 교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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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릿돌이 되시는 예수님 - 제 7과 - 2021년 4월 18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20장 9 -19절 강호길 2021.04.20 292226
297 죄를 사하는 권세(權勢)가 있는 예수님 - 제 10과 - 2021년 2월 7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5장 17 -26절 강호길 2021.02.04 129781
296 두려워하다 - 제 5과 - 2016년 7월 3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강호길 2016.06.26 101616
295 속이는 자 - 제 1과 - 2018년 12월 2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창세기 27장 18 -29절 강호길 2018.11.25 37686
294 모든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라 - 제 8과 - 2018년 1월21일 장년성경공부 - 사도행전 16장 16 -19절; 시 139편 13 -16절 강호길 2018.01.15 33018
293 하나로 연합되다 : 2016년 3월 20일 주일 장년성경 연구 - 제 3과 사도행전 공부 1 강호길 2016.03.13 10694
292 한 마음으로 함께 걸어가는 성도들 - 제 7과 - 2019년 10월 13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에베소서 4장 1 -10절 강호길 2019.10.05 3801
291 불완전한 가정 - 제 3과 - 2018년 12월 16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창세기 29장 16 -30절 강호길 2018.12.08 2212
290 이기심 없이 섬기는 사역 - 2016년 4월 24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제 8과 - 사도행전 공부 강호길 2016.04.17 2211
289 변화되다 - 제 6과 - 2019년 1월 6일 주일 - 장년성경연구 교사용 교재 - 창세기 32장 24 -32절 강호길 2018.12.30 1793
288 선지자보다 크신 예수님 - 제 4과 - 2017년 3월 26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강호길 2017.03.19 1617
287 왕이 임하시다 - 2015년 12월 13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제 2과 마태복음 공부 강호길 2015.12.02 1538
286 죄에 대한 징벌과 용서 - 제 13과 - 2018년 8월 26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사무엘하 24장 10 -25절 강호길 2018.08.19 1330
28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 제 2과 - 2018년 3월 11일 장년성경연구 - 고린도전서 6장 12 -20절 강호길 2018.03.06 1283
284 예수님의 명령 - 제 7과 - 2019년 4월 14일 주일 - 장년성경연구 교사용 교재 - 마가복음 9장 14 -27절 강호길 2019.04.08 1146
283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다 - 2015년 9월 6일 장년성경공부 교사용 창세기 제 1과 2 Hokil 2015.10.1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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