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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7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13과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함  

 

성경진리:

낙심이 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는 마음은 큰 힘과 격려가 된다.

주요교리: 성령 하나님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의 품성과 품격을 키워주시고, 신자들을 도와주시며, 마지막 구속의 날까지 믿는 자들을 인쳐주신다.

성령님이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거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게 해 주시는 보증이 되고 있다.

 

암송구절:  시 42편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Why, my soul, are you downcast?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my God.

 

시작하는 글:

인간의 삶에는 자기가 책임지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독감 예방 주사를 맞고, 비타민을 골고루 섭취하며, 손 소독제를 가지고 다니며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는데도, 독감에 걸릴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운동을 규칙적으로 열심히 하며 건강에 좋다는 음식을 가려먹는데도, 심장병에 걸린다.

심지어 우리는 다른 동료들보다 더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중요한 프로젝트를 완성했는데도, 다른 사람의 것이 채택되거나 아예 인정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인생은 자기가 원하며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시편기자도 인생이 불친절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간절히 원했지만,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으로 인하여 즐거웠던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보였다.

이제 절망가운데 빠져서, 인생은 거의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의 영혼이 원수들에게 억압을 당할 때, 그의 인생의 배는 표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같은 일은 시편 기자 혼자만 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때, 모세는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민 11: 15).

선지자 엘리야는 혼자서 두려움에 차 있었을 때,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왕상 19: 2 -4).

선지자 예레미야는 너무나 낙심되고 상심한 나머지 태어나지 않았더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렘 20: 14 -18).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조차도 그 같은 실의와 절망을 경험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오늘 날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절망감과 싸울 때 놀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몸이 불완전한 것처럼 우리의 감정도 불완전하며, 종종 한계점(限界點)에 이를 때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저주를 받아 타락한 곳으로, 더 이상 본래 창조된 대로 완벽하지 않다.

아무도 영적 및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편 기자는 자기 연민에 빠지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신실 하심을 기억하고, 그를 계속 찬양하였다.

그는 탈출구(脫出口)가 하나님을 바라 봄으로써 시작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배경설명

42 -43편

시편 42 편과 43 편은 서로 밀접하게 관계되고 있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결론이다.

심지어 어떤 성경학자들은 그들이 실제로 한 노래의 두 부분이라고 제안한다.

그 같은 결론을 내리는 하나의 증거는 42편 5절과 11절 그리고 43편 5절에서 세 번에 걸쳐 되풀이되고 있는 “반복 절”이 되고 있다.

또 다른 단서는 시편 42 편에는 표제가 있는데 반해 시편 43 편에는 없는 점이다.

게다가, 두 시편은 모두 ‘영적인 절망’이라는 같은 주제(主題)를 나타내고 있다.

시 42편의 표제는 또한 이 시가 “마스길”이 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성경학자들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지만, 그 말이 ‘지혜롭게 하다’ 혹은 ‘가르치다’ 라는 히브리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마스길” 시는 지혜나 이해력을 키워주려는 목적으로 지어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한편, 어떤 성경학자들은 마스길 시들은 예배를 목적으로 특별하게 지어진 시편들을 가리켰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외에도,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것이 되고 있다.

노래하는 자들과 연주자들로 이루어진 이 가족은 레위 지파의 일부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를 드릴 때 심히 큰 소리로 여호와를 찬송하였다 (대하 20: 19).

실제로 고라는 야곱의 아들인 레위의 증손자였는데, 하나님은 레위 지파에 속한 고라 가족을 예배 인도자들로 삼으셨다 (출 6 : 16-21).

비극적으로, 고라는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있었을 때 모세와 아론에 대한 반역에 합류하였다 (민 16: 1).

이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은 찬송으로 예배를 인도하던 이 가족을 멸하셨다 (민 16: 31 -36).

그들 중 일부는 살아남은 것이 분명한 것이, 그들의 자손들은 후에 성전의 문지기들이 되었다 (대상 9: 19). 

시 42 편은 시편 기자의 깊은 낙심과 좌절 배후에 있는 주요한 문제들을 밝혀주고 있다.

시편 기자는 예배의 중심지인 하나님의 ”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헤르몬 산 인근의 요르단 강 상류에 살면서 이 시편을 썼을 수도 있다 (42: 6 -7).

그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마음이 기쁨에 넘쳤던 날들이 그리웠다 (42: 2, 4 -5).

시편 기자가 그 같은 감정의 갈등을 겪게 되었던 또 다른 한가지 이유는 그의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부인하는 대적들의 지속적인 박해 때문이었다 (42: 3, 9- 10).

어떤 면에서, 그는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것처럼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기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다 (4: 11).

 

학습구절연구

영적인 갈증 (시 42편 1 -4절)

42: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42: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42: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2: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 도다

42편 1절 – 이 시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는 직유 표현법으로 시작되고 있다.

고대 근동에 사는 사람들은 갈증의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물을 찾는 일은 종종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었다.

시냇물”로 번역된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수로” 혹은 “계곡”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광야 지역에서, 그 같은 수로나 계곡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들이 물을 담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이 시편의 첫 구절은 목마른 사슴 한 마리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지역에서 여기 저기 새로운 계곡을 찾아 다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우리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 삶의 어려움은 도리어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는 유익이 될 수 있다.

그 같은 갈망이 유익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낙심한 심령을 고쳐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시 119편 71절에서 시편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다)”고 하였다.  

성령님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에 대한 영적 갈증을 물에 대한 갈증으로 묘사하도록 영감을 주셨다.

갈증은 강력한 비유가 되고 있다.

식수는 필수적인 것이지, 선택 사항이 아니다.

물은 매일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이지, 어쩌다 혹은 부수적(附隨的)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무도 식수를 탐하는 죄는 짓지 않는다.

건강을 위해 될 수 있는 한 물을 많이 마시라고 의사들은 권한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삶의 결정들을 내리며, 성취감을 얻고, 삶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속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갈증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예수님은 외쳐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하셨다 (요 7: 37 -38).   

요한복음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그 말씀을 해석하여 언급하기를,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요 7: 39).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 할 때, 하나님은 생수의 강과 같은 성령님을 주셔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갈급함을 채워주신다.  

42편 2절 -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말을 반복함으로, 그의 갈증의 깊이와 강도(强度)를 강조하였다.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라는 말은 시편기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있으며,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시편기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그가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여호와를 예배하던 때를 몹시 갈망하고 있은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 드리는 큰 기쁨을 경험 한 사람들 만이 그같이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지 못할 때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잊을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의 삶 속에서 일하신 특별한 장소가 있다.

그 장소는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곳이거나, 죄의 짐이 자신에게서 벗겨진 것을 깨달은 곳, 혹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선뜻 응답하고 나섰던 곳이 될 수 있다.

특별한 장소는 또한 믿음의 가족들과 함께 가까이 지내며, 믿음을 키우고,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곳이 될 수도 있다.  

신자들이 실의에 빠졌을 때, 옛날에 기쁘게 믿음 생활을 잘 하던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의 침체된 믿음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시편기자가 바로 그같이 느끼고 있었다.

42편 3절 -시편 기자의 우울증은 한 순간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라는 그의 말은 강하고도 지속적인 고통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영적 갈증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물인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였지만, 그가 가진 것은 단지 눈물뿐이었다.

눈물이 음식이 되었다는 말은 음식을 먹을 마음이 없었던 것을 나타낼 수 있다.

그의 울음은 낮이 밤으로 바뀌어도 약해지지 않았다.

시편 기자는 내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던 반면에, 외적인 핍박도 겪고 있었다.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조롱하며 “종일” 그를 핍박하였다.     

2절과 4절은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어디에나 계신다.

시편기자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그곳에 계셨다.

시편기자를 핍박한 자들도 그 같은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의 질문은 왜 하나님이 시편기자를 도와주지 않느냐는 것이 되고 있다.

그들이 뜻한 것은, ‘왜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나타나지 않고 있는가? 여기 계셔야 하지 않겠느냐?’이다.

그런 질문은 비난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 질문은 시편기자를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죄를 졌거나 하나님의 임재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인해 시편 기자를 비난하는 말이 될 수 있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간에, 그 질문은 마음을 상하게 하고 고통이 되었다.

42편 4절 - 시편 기자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고 슬프게 만든 또 다른 요인은 그가 한때 즐겁게 행하던 일에 대한 기억이었다.

시편 기자는 즐겁고 행복했던 지난 날들을 회상하였다.

그는 예배에 참석했을 뿐 아니라,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는 또한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던일)”을 기억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고 하였다.

시 42편의 저자는 가족이나, 종족, 심지어 부족의 지도자로 예배 행렬을 인도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시편들도 그 같은 예배 행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22: 1; 132: 6 -7).

그 그룹에 속한 시편들은 모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120 -134).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같이 올라갈 때 그것은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행렬이었다.   

 

낙심의 물결에 휩쓸림 (시 42편 5 -8절)

42: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42: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42: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42편 5절 -시편 기자는 내리누르는 삶의 현실을 바라보고, 그것을 바다의 폭풍에 휩쓸리는 것에다 비겼다.

그 같은 폭풍의 한 가운데서도,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고 하였다.

본문 구절인 5절은 11절과 43편 5절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반복 절”의 첫 번째가 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을 “내 영혼아”라고 부르면서 먼저 자신에게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로 물었다.  

그 같은 감정이 생기게 된 원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같이 질문할 때, 우리는 종종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나쁘게 행한 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고 낙심이 되었다면, 그 같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첫 단계는 마음으로 그를 용서해 주는 일이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난다든지 낙심이 되면, 그것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은 이기심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더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으로 인하여 불안해 하며 낙심할 수 있다.

시편 기자의 경우가 그랬다.

그 같은 상황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들의 삶이 편하고 즐거울 때,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기가 쉽다.

참된 찬송은, 삶이 힘들고 낙심이 마음 깊숙이 파고 들지라도,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를 찬양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42편 6절 – 시편기자는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라는 말로 계속 자신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였다.

그 같은 영적 상태로 인하여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갈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고 하였다.

42편 7 -8절 - 영적 낙심이나 좌절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물에 빠지는 것에다 비유할 때가 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 압도당하는 것처럼 느낀다.

시편 기자도 그 같은 감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 바로 밑에 있는 것처럼 느낀 것으로 표현하였다.

시편기자는 또한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고 하였다.

파도와 물결”이라는 이중적 용어들은 어떤 사람이 문제의 덫에 걸린 것을 시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이 되고 있다.

시편기자가 그것들을 “주의 (것)”, 즉 하나님으로 온 것으로 표현한 것은 그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 믿음을 강조하는데 목적이 있다.

욥과 같이, 시편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만 받아들이고 좋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옳은지를 물었던 것이다 (욥 2: 10).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며 관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낙심이나 좌절감을 이기는 일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언약의 명칭인 “여호와”로 사용하며,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풀어주신다고 기록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생명 줄을 던져주시는 것처럼, 그는 그의 사랑에게 우리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신다.

삶이 끝 없는 실패를 거듭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삶의 상황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 후에,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인 “그의 찬송”을 한다.

우리의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생명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될 것이다.

 

비방의 칼에 찔림 (시 42편 9 -11절)

42: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42: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42: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편 9절 많은 신자들은 핍박을 당하거나 적대에 직면할 때, 종종 양면적인 감정을 가질 수 있다.

시편기자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내 반석”으로 고백하면서도, 금방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라고 부르짖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거듭거듭 밝혔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직접 알고 있었다.

시편기자는 이전에 하나님을 “살아계시는 하나님” (42: 2), “여호와” (42: 8), 그리고 “생명의 하나님” (42: 8)으로 불렀다.

그는 9절에서는 하나님을 “내 반석”으로 불렀다.  

그 용어는 산에 있는 바위 혹은 바위의 갈라진 틈으로, 굳건히 설 수 있는 혹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요새가 되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기자는, 다윗이 시 22편을 기록할 때 느꼈던 것처럼, 버림을 받고 분리되어있다는 감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혼자서 견딜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겪어야 했을 때 시 22 편 1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 같은 감정을 드러내셨다.

그 같은 인간적인 슬픔과 연약함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어떤 질문에나 대답해 주실 수 있고,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시며,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어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 앞에 우리의 고통을 내어 놓은 방법이 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 생애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을 겪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어 버렸다 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대답하셨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 15).

42편 10 -11절 – 시편기자는 9절을 “원수의 압제”에 대한 언급으로 끝맺었다.

그는 10절을 그의 “대적이 (그를) 비방(한다)”는 말로 시작하였다.

그는 또한 3절의 질문을 반복하였다.

그의 대적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방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인해 시편기자를 핍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중 일부는 그 같은 겪어보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해 비방을 받고 핍박을 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시편기자는 그 같은 비방을 자기 “뼈를 찌르는 칼”로 표현하였다.

믿음의 신실한 자라도 그 같은 상황과 여건 속에서 낙심되기가 쉽다.

11절은 5절과 똑 같은 내용이 되고 있다.

 

말씀의 적용:

  • 신자들은 영적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기를 갈망하여야 한다.
  • 하나님은 가장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항상 신자들과 함께 해 주신다.
  • 신자들은 어려움과 불확실성에 직면하더라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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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계명을 주신 하나님 - 제 6과 - 2017년 10월 8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출애굽기 20장 1 -17절 강호길 2017.10.02 423
109 충분하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 제 5과 - 2017년 10월 1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출애굽기 16장 1 -5절, 11 -20절 강호길 2017.09.24 375
108 승리의 하나님 - 제 4과 - 2017년 9월 2일4 주일 장년성경연구 - 출애굽기 14장 13 -28절 강호길 2017.09.22 235
107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 백성 - 제 3과 - 2017년 9월 17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출애굽기 12장 1 -13절 강호길 2017.09.09 360
106 바로와의 대결 - 제 2과 - 2017년 9월 10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출애굽기 7장 1 -13절 강호길 2017.09.03 211
105 부적당하다고 주저한 모세 - 제 1 과 - 2017년 9월 3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출애굽기 3장 4 -14절; 4장 13 -16절 강호길 2017.08.26 192
»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함 - 13과 - 2017년 8월 27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시 42편 강호길 2017.08.19 213
103 보호자이신 하나님 - 12과 - 2017년 8월 20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시 141편 강호길 2017.08.15 368
102 정결함을 받은 사람들 - 제 11과 - 2017년 8월 13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시 32편 강호길 2017.08.06 158
101 죄의 고백 - 제 10과 - 2017년 8월 6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시 51편 1 -17절 강호길 2017.07.31 180
100 진실하신 하나님 - 제 9과 - 2017년 7월 30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시 146편 강호길 2017.07.24 194
99 하나님의 사랑 - 제 8과 - 2017년 7월 23일 장년성경연구 - 시 136편 강호길 2017.07.16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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