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순종하신 예수님 - 제 9과 - 2021년 5월 2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22장 41 -53절

by 강호길 posted May 0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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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성경연구 지도자 교안
2021년 5월 2일 주일 용

 

번역 및 편집: 강 호길
hokilkahng@hotmail.com

 

 

9과  

 

 

기꺼이 순종하신 예수님                    

 

 

학습구절: 누가복음 22장 41 -53절    

 

성경진리:

예수님은 아버지의 구속 계획에 기꺼이 순복(順服)하셨다.      

 

 주요교리: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께 최상의 사랑과 존경과 순종을 보여야 한다 (신 6: 4 -5).    

 

 

암송구절:  누가복음 22장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Father, if you are willing,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시작하는 글:  

 

인간의 삶은 문제가 생길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생적(日常的)인 생활 속에서도 힘들고 어려울 수 있다.

직업에 대한 압박감, 건강문제, 및 가족 관계로 인한 갈등 등은 삶을 도전과 투쟁의 장으로 만들 수 있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믿음생활을 하는 것조차도 안락한 생활 영역을 벗어날 때 큰 도전이 될 수 있다.

그 같은 각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오늘 학과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수행하실 때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복하며 그를 신뢰(信賴)하시는 것을 본다.

 

어떤 상황들이 혹은 무엇이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어려운 일이 되고 있습니까?  

 

 

본문 배경설명

 

누가복음 22장 39절로부터 53절까지
 

사도들과 유월절 식사를 함께 나누시고 주의 만찬을 제정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길게 말씀 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요 14 -17장).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을 떠나 성 밖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기드론 계곡을 건너 감람 산으로 돌아 왔는데, 그곳은 예수님이 그 주간에 몇 차례에 걸쳐 밤을 보내신 장소가 되고 있다 (눅 22: 39; 요 8: 1).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도하기 위해 자주 찾아간 특별한 장소였다 (막 14: 32).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동안 조용히 혼자 있기를 원하셨다.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나아가 “무릎을 끓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유혹(誘惑)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지시(指示)하셨다.      

흥미 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으시고, 그들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날 밤이 끝나기 전에, 심각한 시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만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예수님은 따로 떨어져 기도하고 돌아오셔서 제자들이 잠자는 것을 보셨다 (막 14: 33 -42).

예수님은 그같이 위중(危重)한 때에 제자들이 자기와 함께 깨어있을 수 없는 것을 질책하셨다.

    기도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곧 닥치게 될 시련(試鍊)에 대한 자신의 솔직(率直)한 심정(心情)을 아버지께 정직(正直)하게 표현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도 또한 완전한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기도는 너무나 강렬해서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획(計劃)을 기꺼이 따르기를 원하셨다 (빌 2: 6 -8).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한 일이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인간의 죄를 자신이 지고 대신 죽으셔야 하였다 (고후 5: 2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눅 22 52) 일단의 성전 경비병들과 함께 도착하였다.  

유다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유월절 음식을 드실 때 혼자 다락방을 떠났다가(요 13: 30), 이제 예수님을 체포할 무리를 이끌고 감람 산으로 왔던 것이다.

유다는 그들에게 암호를 정하여 정하여 주기를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기를 배반하고 있는 것을 아셨는데도 가까이 와서 입을 맞추게 하였다.  

그 같은 일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유다에게는 한 노예의 값인 은 삼십 개로 예수님을 팔기로 한 음모가 되었는데 반해, 하나님의 계획으로는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는 일이 되었다 (마 26:15; 슥 11:12).  

     처음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호하며 지키려고 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베어버렸다 (요 18: 10).

예수님은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들이 맹세했던 충성심은 경비병들의 칼과 몽치와 횃불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학습구절 연구

 

기도로 순종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22장 41 -46절)  

 

제자들과 함께 감람 산으로 오신 후, 예수님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들과 떨어져 기도 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뜻과 목적(目的)을 구하며 그 뜻과 목적을 따르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셨다.

한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힘을 더하여 준 후에, 예수님은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제자들에게 가서” 그들이 잠든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고 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셨다.

 

누가복음 22장 41 -42절

  • 그들을 떠나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끓고 기도하여
  •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겟세마네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동산으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자주 찾아가신 장소였다 (요 18: 1 -2).

조용하고 친숙한 그곳은 마음과 시간을 집중하여 기도하기에 좋은 장소가 되었다.

유월절 식사를 마치고 주의 만찬을 제정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이 기도장소로 오셨다.

예수님은 한 곳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동산 안으로 좀더 깊이 들어가셨다 (막 14: 33 -35).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다음,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끓고 기도하[셨다.]

돌 던질 만큼”이란 말은 짧은 거리를 가리킨다.

1 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기도 자세는 서서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무릎을 끓고” 기도하셨다.

기도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아버지 앞에서 순종(順從)하는 자세(姿勢)를 취하셨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동등(同等)하시며, 태초부터 공존하시고 영존하시지만, 인간이 되신 그는 자신을 낮추시고 모든 면에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服從)”하셨다 (빌 2: 8).

     가장 큰 도전과 시련에 직면하셨을 때, 예수님은 기도를 그 도전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고 시험에 들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택하시고 최우선적(最優先的)인 과제(課題)로 삼으셨다.

예수님은 또한 그같이 전례 없는 시련과 고통에 직면(直面)하여 유혹에 빠지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자신이 간절히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도록 촉구하셨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본(基本)이 되고 있다.

특별히, 시련과 유혹에 직면(直面)할 때, 우리는 기도로 준비(準備)하고 훈련(訓練)하며 영적인 힘과 인도하심을 얻는 것의 중요성(重要性)을 강조한다.

건강전문가(健康專門家)들은 자주 우리들에게 질병(疾病)을 예방하고 건강한 생활을 하기 위해 좋은 건강습관(健康習慣)을 기르고 식이요법(食餌療法)을 실천하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기도는 믿는 자들이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며 강한 믿음으로 시련을 이기도록 준비(準備)시켜준다.  

     누가는 42절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을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로 간결하고도 강하게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는데, 그같이 가깝고도 친숙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되고 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이란 말은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으로, 모든 기도에 대한 응답이 전적으로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표현이 되고 있다.

기도의 목적(目的)은 하나님께 우리의 뜻을 행하시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最善)의 목적(目的)에 따라 응답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요청(要請)을 제출하는 것이다.       

우리는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항상 하나님의 목적이나 때와 일치(一致)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말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이미 정해져 있고 바꿀 수 없는 것이니 기도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은 우리가 간절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구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신다 (눅 11: 9).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간구하고 그 간구에 대한 응답을 아버지께 맡기셨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목적을 깨닫게 되며 그 뜻과 목적에 맞게 기도하는 것을 기도의 목적으로 삼는다.

믿는 자들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을 얻는 줄을 안다 (요일 5: 14 -15).

     예수님은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기도하셨는데, 우리는 “이 잔”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겪으실 고난과 관계되고 있다.

그렇지만, 더 중요(重要)한 것은 그 안에 담겨있는 뜻으로, 그 “”은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시고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다.

성경은 두 가지 신학용어(神學用語)를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묘사한다.

하나는 “화목”(和睦 -Propitiation)으로, 화목은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義)가 충족(充足)될 때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요일 2: 2).

다른 하나는 “속죄”(贖罪 – Atonement)로, 속죄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 죄가 사함을 받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롬 5: 11).

두 용어(用語)는 모두 예수님께서 인간(人間)의 죄(罪)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풀어드린 이유와 방법을 묘사하고 있다.             

 

누가복음 22장 43 -46절

  •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아버지께서는 고난의 잔을 옮겨 주시지 않고, 천사를 보내어 힘을 더해 주셨다.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서 천사가 예수님을 도와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40일동안 금식을 하신 후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 천사들이 와서 그를 도와주었다 (마 4: 11; 막 1: 13).

천사가 “힘을 더 하[여]” 준 후에 예수님께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도움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즉시 응답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누가는 “힘쓰고 애써”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이 크게 괴로워하셨던 것으로 묘사하였다.

“힘쓰고 애써”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agonion)에서 고통 혹은 번민을 뜻하는 영어의   ‘agony’ 혹은 ‘괴로워하다’ 또는 ‘번민하다’는 뜻의 ‘agonize’라는 동사가 생겨났다.

예수님은 단순히 걱정만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하실 고난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번민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님의 그 같은 상태를 “힘쓰고 애써”라는 말로 묘사하였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완전한 신이 되실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 되시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천사가 와서 힘을 더하여주자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네 복음서 중에, 누가복음서만이 예수님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문구에 대한 해석(解釋)은 다양(多樣)하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주장하기를 그 기술(記述)은 문자적(文字的)이 아니라, 비유적(比喩的)으로 해석(解釋)되어야 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너무도 고뇌에 차서 그리고 열정적으로 기도하셨기 때문에 피가 흘러내리듯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는 것이다.

다른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번민과 고통의 강도로 인해 예수님의 이마의 모세혈관들이 터져서 피부의 땀구멍을 통해 땀과 함께 실제로 파가 나오는 신체적 반응이 촉발했다고 제안한다.

어느 해석이 되든지 간에, 그 기술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을 때에 임박한 고통에 대해 느끼셨던 정신적 및 육체적 고통을 보여주고 있다.

     그같이 고뇌에 차서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가시니 그들은 “슬픔으로 인하여” 잠들어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것은 설명(說明)을 듣기 위한 질문(質問)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는 경고(警告)가 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음 날의 시련과 어려움을 견디려면 기도 만이 제공 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씨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품(性品) 어떤 면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순종하게 주고 있습니까?

 

 

배신까지도 참고 받아들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22장 47 -50절)

 

유다는 “한 무리”를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와서 예수님께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배신하는 일을 행하였다.

예수님은 유다의 그 같은 배신까지도 참고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셨다.

 

누가복음 22장 47 -48절:

  •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한 무리”로 묘사되고 있는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성전의 경비[병]”들이었다 (22: 52).

그때까지만 해도 로마군인들은 예수님의 일에 관계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들키지 않게 몰래 접근하여 예수님을 잡을 양으로 조용히 동산 안으로 들어온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놀라운 것은 유다가 그 무리의 맨 앞에 서서 그들을 인도하여 온 일이다.

누가는 유다를 특별히 “열둘 중의 하나”로 밝혔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 택함을 받았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제자들 그룹의 자금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겼을 뿐 아니라, 병을 고치는 능력과 복음을 전파하는 권세를 주시기까지 하였다 (눅 9: 1 -5).

그래서, 유다는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들을 고치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그 같은 특권적인 역할(役割)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공모하여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들의 손에 주님을 넘겨주기로 하였던 것이다.

     유다는 폭도의 무리와 함께 왔을 뿐 아니라, “그들을 앞장서” 왔다.

유다가 이 장소와 시간 대를 선택한 것은, 그 시간과 장소가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계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으나 항상 예수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백성을 두려워하[여]”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20: 19).

지지자들의 무리에게서 떨어져 있는 이곳 동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힘들이지 않고 붙잡아갈 수 있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무리”가 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유다가 “예수[님]께 입맞추려고 가까이” 다가왔다.

당시 그들 문화권에서, 가까운 사람들은 일반적(一般的)으로 한쪽이나 양쪽 뺨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서로 인사(人事)를 하였다.

유다의 행동(行動)은 예수님을 체포할 성전 경비병들에게 그를 확인시켜주는 방법(方法)이 되었을 뿐 아니라, 메시야가 친구에게 배신당할 것이라는 예언(豫言)을 성취시키는 일이 되고 있다 (슥 13: 6 -8).

    예수님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유다가 인자를 배신하고 있는 사실뿐만 아니라 “입맞춤”으로 그같이 하는 것까지도 참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예수님은 "인자”라는 호칭(呼稱)을 사용하셔서 유다가 그와 가까운 친구가 된 사람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유다는 성경에 약속(約束)되어 있는 분이자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신 메시야에게 불충성하여 그를 배신한 것이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는 말은 또한 예수님께서 유다가 하고 있는 일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던 것을 밝혀주고 있다.

 

누가복음 22장 49 -50절:

  •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 지라  

주위 사람들”이란 말은 예수님을 따라 겟세마네 동산까지 간 열한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은 “그 된 일을” 보았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경비병들을 데리고 온 것을 본 그들은 예수님께서 위험(危險)에 처하신 것을 알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당황했던, 그들은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라고 물었다.

      다락방에서 유월절 식사를 마치고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을 때, 예수님은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는 말씀으로 검을 준비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눅 22: 35 -38).

그러나, 그 말은 제자들을 보내어 실제 검을 사게 하려는 의도(意圖)로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자들을 준비(準備)시키시기 위한 목적(目的)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전에 복음전파와 병 고치는 사역을 위해 제자들을 보내셨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돈이나 두 벌 옷 등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다 (눅 9: 1 -6).

그러나 이제 그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할 때가 왔던 것이다.

     예수님이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검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눅 22: 36), 제자들이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었는데 (눅 22: 38), 그들은 그 검을 동산으로 가지고 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목적과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실제로 그들이 그날 밤에 예수님처럼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목적과 계획에 기꺼이 순종하기를 원하였지만, 제자들은 처음에는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라고 물었고, 검을 가지고 있던 제자 중의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렸다 (22: 50).  

요한복음은 그같이 공격한 제자의 이름을 “시몬 베드로”로 밝히고 있다 (요 18: 10).

요한은 또한 그 종의 이름을 “말고”로 밝혔다 (요 18: 10).

바로 이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방어하며 심지어 그와 함께 감옥이나 죽는데 까지도 가겠다고 담대하게 선언했었다 (눅 22: 33).

항상 충동적이었던 베드로는 그들이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칼은 휘두르다가 말고의 오른 쪽 귀를 쳐서 떨어뜨렸던 것이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께서 배신을 당하시는 자리에 있었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배신감을 느낄 때, 예수님의 모범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주고 있습니까?

 

행동으로 순복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22장 51 -53절)

 

예수님은 혼란에 빠진 상황을 장악하셔서 종의 잘린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  

그는 먼저 제자들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신 다음, 자기를 체포하러 온 무리에게 관심을 돌려 말씀하셨다.

자기를 체포하려는 무리에게 자신을 체포하도록 허용하면서 말씀하셨을 때, 그의 말에는 큰 용기와 사랑이 나타났다.

 

누가복음 22장 51절:

  •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베드로가 칼로 말고의 귀를 떨어뜨린 일은 상황을 악화시키고 재난과 참사로 확대시키며 종결시키는 일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선뜻 나서서 개입(介入)하시고 말과 행동으로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고 종의 귀를 치료해 주셨다.  

네 복음서 중에서, 누가만이 예수님께서 종의 “”를 “만져 낫게” 해주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기록하기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 칼을 칼 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시면서 그가 무기를 사용한 것을 꾸짖으셨다고 한다 (마 26: 52).

 

누가복음 22장 52 -53절:

  •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로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그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말씀하셨다.

"장로들"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산헤드린 혹은 공회(公會)를 가리켰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체포를 승인 한 유대인의 최고 통치기구(統治機構)였다.

여기서 “[성전]경비대장들”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예수님을 체포하는 일이 로마 당국자들의 허락이 없이 진행되었으므로 로마 군인들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들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과 대결하신 일은 그들의 비겁함을 드러내 주었다.

왜 그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는가?          

시몬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친 순간적(瞬間的)인 사건(事件)은 그들의 행동(行動)을 정당화시키는 일이 되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반란(叛亂)을 진압하려는 것처럼 완전무장(完全武裝)을 하고 왔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기를 체포 할 기회가 많았던 것을 상기시켜 주셨다.

예수님은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고 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명예를 탄핵하고 비겁함을 정죄하는 말씀이 되었다.

     그 시점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저항(抵抗)하거나 대항(對抗)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그들의 손에 맡기셨다.

만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과 목적(目的)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면, 지구상의 어떤 힘도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어 그를 십자가에서 구해 주실 수 있었다 (마 26: 53).

당시 로마 군대조직상, “열두 군단”은 6만 명이 넘는 수가 되었다. 

     “이제는 너희 때요”라는 말은 악(惡)의 세력(勢力)이 이기는 정한 때가 된 것을 가리켰다.

예수님께서 악의 세력이 이기는 때인 “너희 때”를 “어둠의 권세”로 표현(表現)하셨는데, 그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잔학한 행위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이해하시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탄은 태초부터 하나님을 대적할 음모(陰謀)와 모략(謀略)를 꾸몄다.

표면상(表面上)으로는, 사탄은 세상에서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며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사탄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용(許容)하지 않으시면 어떤 일도 일어날 수가 없다.  

때때로 우리는 적이 이기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감정(感情)에 굴복하면, 우리는 낙담하거나 패배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 하시는 것과 그를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꺼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받아 들일 수 있다 (롬 8: 28).

 

하나님께서 그가 없이는 행하기 불가능한 어떤 어려운 일들을 행하도록 부르셨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어떻게 나타냅니까?

 

 

말씀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기:

  •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기꺼이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
  •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를 때 확신을 가지고 행할 수 있다.   
  • 신자들은 사람들의 거절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아직 행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임무를 행하기 위해 당신이 취할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다음 단계를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얻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데 방해가 되며 위협이 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밝혀보십시오.
당신을 반대하거나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이 장년 성경연구 지도자 교재는 LifeWay에서 출간하여 보급하고 있는 Explore the Bible 교과과정의 학생용 한국어 교재를 가르치고 배우는데 도움이 되도록, 강 호길 목사가 LifeWay의 허락을 받아 영어 지도자 교재를 번역 및 편집한 것입니다.
그같이 허락한 LifeWay에 감사를 드립니다.
장년 성경연구 한국어 학생 교재는 LifeWay에서 주문하여, 장년 주일학교 시간에 혹은 목장이나 구역 모임에서 성경공부 교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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