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사하는 권세(權勢)가 있는 예수님 - 제 10과 - 2021년 2월 7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누가복음 5장 17 -26절

by 강호길 posted Feb 0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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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성경연구 지도자 교안
2021년 2월 7일 주일 용

 

번역 및 편집: 강 호길
hokilkahng@hotmail.com

 

10과  

 

 

죄를 사하는 권세(權勢)가 있는 예수님                 

 

 

학습구절: 누가복음 5장 17 -26절    

 

성경진리: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주요교리: 성자(聖子) 하나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요 8: 58).    

 

 

암송구절:  누가복음 5장 24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But I want you to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So he said to the paralyzed man,

‘I tell you, get up, take your mat and go home.’”

 

 

시작하는 글:  

 

농구 선수들은 “삼중위협”(三重威脅)의 위치와 자세(“triple threat” position)의 힘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선수가 공을 가졌을 때, 슛을 하거나, 패스를 하거나, 골대 밑으로 몰고 가기 좋은 위치(位置)와 자세(姿勢)를 가리키는 말이다.

삼중 위협의 위치와 자세를 취한 선수는 수비 팀에 추가의 압력을 가한다.

여러 가지 능력(能力)을 발휘(發揮)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좋은 일이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훌륭한 설교자로 혹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자로 생각하였다.

그것들은 모두 맞는 말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진정으로 주시려고 하는 것을 놓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놀랍고도 중요한 선물은 인간의 죄를 사해주시는 권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장 많이 묘사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같은 일반적인 묘사들은 예수에 대한 사람의 어떤 기대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까?

 

 

본문 배경설명

 

누가복음 5장 12절로부터 26절까지
 

예수님이 어부들인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을 만나셔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사건 (5: 1 -11)과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 (5: 27 -32) 사이에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두 병자를 고쳐주신 두 가지 사건(事件)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나병 들린 사람을 깨끗이 고쳐주신 일이고 (5: 12 -16), 다른 하나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일이 되고 있다 (5: 17 -26).

병자를 고치는 일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흔한 일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한 동네에 계실 때, 한 나병 환자가 담대하게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간청하면서, 예수님이 “원하시면 [자기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나타내었다 (5: 12).

나병 환자를 만지는 것은 금지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당시의 사회적 규범을 깨뜨리셨다.

먼저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났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더 많이 퍼지게 되자, “수 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은 예수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마치고 가버나움으로 돌아 오셨을 때 일어났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 자리에는 여러 곳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려고 하였다 (5: 18).

그러나 그 집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 올 수 없었다.

절박함과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비상한 방법으로 일을 하게 하였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위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어 천장에 구멍을 내고, 병자를 침상째 예수님이 앉아서 가르치고 계신 방 가운데로 달아 내렸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방해가 아니라 기회로 보셨다.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므로, 중풍병자가 온전하게 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당시 예수님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믿음에 근거(根據)하여 그같이 말씀하셨다.

분노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며, 예수님을 신성을 모독하는 자로 정죄하였다 (5: 21).

     그 점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다.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는 치료 자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실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되신다.  

그 같은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입증(立證)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다.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가 누었던 침상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자, 목격자들은 그들이 본 것에 놀라워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학습구절 연구

 

믿음의 증거를 나타낸 사람들 (누가복음 5장 17 -19절)  

 

하루는 예수님이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셨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서 일어난 일로 밝혀지고 있다 (막 2: 1 -12).

그 자리에는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침상에 메워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고침을 받기 원하였다 (막 2: 3).

예수님이 앉아 계신 자리까지 들어갈 수 없음으로, 그들은 중풍병자를 지붕위로 메고 올라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천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

 

누가복음 5장 17절

  •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갈릴리 여러 지역을 다시며 전도하시며 병자들을 고치시던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막 2: 1).

하루는 예수님이 그 집에서 가르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그 자리에는 많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도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1세기에 유대교에서 가장 크고 가장 보수적인 종파의 하나로 대표되었다.   

또 다른 종파인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세력과 권위를 행사한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유대지역과 갈릴리 전역에 흩어져있는 회당을 중심으로 큰 영향을 행사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권위 있는 성경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율법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율법 자체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제한과 규칙들을 부과하는 율법주의(律法主義)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일반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율법의 진정한 해석자(解釋者)이자 보호자(保護者)로 여기며 주장하였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갈등은 일반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무거운 전통의 짐으로 만들고 율법을 성경에 맞지 않고 부적절하게 해석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거부하신 것에 집중되고 있다.

율법교사”라는 문구는 다른 맥락에서 서기관이라는 용어와 대략적으로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눅 15: 2).

서기관(書記官)으로도 불려지고 있던 “율법교사”들은 성경말씀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뿐 아니라,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성경전문가들로 인정을 받았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그 자리에는 많은 바리새인들이 와 있었는데, 누가는 그 같은 사실을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온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가는 그들의 동기(動機)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율법적으로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를 찾을 목적으로 찾아 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같은 사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라고 한 6장 7절의 말씀에서도 잘 입증되고 있다.

    누가는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는 말로, 그 날에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함께 하셨다는 당연하게 들리는 말로 17절을 끝 맺고 있다.

누가 복음의 이방인 청중은 치유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다양한 이방 신들에 익숙해 있었다.

의사였던 누가는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은 몸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5장 18 -19절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누가는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메고 [왔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마가는 그 중풍병자를 “ 사람”이 메워가지고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막 2: 3).

그들은 소문을 듣고 구경 삼아 예수님을 보거나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꼭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그들이 침상에 메고 온 중풍병자를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막 2: 1),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은 자기 친구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전에 예수님이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것을 직접 목격했거나, 그 같은 소문을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간에, 그들은 중풍병자 친구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올만큼 예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일행이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하였다.

그 집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가복음은 “ 앞까지도 들어설 자라가 [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밝히고 있다 (2: 2).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들자면, 그곳에 모인 군중들이 영적인 가르침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이라면, 중풍병자가 예수님한테 들어갈 길을 내줄 만큼 영적으로 민감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그같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쉽게 단념하고 돌아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친구의 병을 고쳐주어야겠다는 간절한 염원(念願)과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하자, 네 명의 친구들은 병자를 메고 “지붕”위로 올라갔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택들은 보통 평평한 지붕으로 지어져 있었고, 외부에는 계단이 나 있었다.

평평한 지붕은 가외(加外)의 생활공간(生活空間)으로 사용되어, 여름에는 바람이 부는 시원한 장소가 되었다.

그 같은 건물 구조는 시몬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라고 한 사도 행전 10 장 9 절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지붕들은 다양한 재료들로 덮여있었는데, 작은 집들은 초가 지붕을 사용하였는데 반해, 큰 집이나 고급(高級) 집들은 찰 흙으로 구운 타일이나 석회석 타일로 깔았다.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집은 지붕이 “기와로 덮여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으로 올라간 네 사람은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와들을 벗겨내고 병자를 들어 내릴 만한 크기의 구멍을 내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방안은 갑자기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 차고 천정에서는 나무 조각들과 흙들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도, 집주인은 그들을 막으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같은 실정으로 인해, 어떤 성경 주석자들은 그 집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머무르실 때 거처하신 곳이었거나, 집 주인이 예수님과 가까운 측근이자 열렬한 후원자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세 복음서 (마 9: 1 -8; 막 2: 1-12; 눅 5: 17 -26) 모두 네 사람의 행동으로 인한 소동이나 집 주인의 반응을 묘사하지 않고 있다.

모든 초점(焦點)은 친구들의 끈기와 중풍병자의 필요, 그리고 특별히 그 사람들이 나타낸 놀라운 믿음을 보셨을 때 예수님의 반응에 집중되고 있다.

    친구들의 행동은, 절박한 심정을 암시하고 있는 반면에, 실제로는 희망의 표현이 되고 있다.   

그것은 중풍병자가 일상적인 방법으로 회복 될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뜻하는 일이 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1 세기 가버나움에 살았던 그 중풍병자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셨던 것처럼, 그는 또한 오늘 날 자신의 힘과 방법으로 치료할 수 없는 죄의 병에 걸려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유일하고도 참된 소망이 되신다.         


우리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찾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다 어떤 장애물들을 놓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죄를 사함 받은 믿음 (누가복음 5장 20 -24절)

 

우리는 그날 네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얼마나 먼 곳에서 데려 왔는지 모른다.

우리는 또한 그들이 이전부터 예수님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있었는지. 만일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 어던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거나 어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들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예수님이 병든 친구를 고쳐 주실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따라서 그를 예수님 앞에 데려 오기 위해서는 어떤 장벽이나 장애물도 극복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친구의 육체적 치유를 훨씬 뛰어 넘는 놀라운 것이 되고 있다. 

 

누가복음 5장 20 -21절:

  •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네 사람이 지붕을 뚫고 “병자를 침상째” 방으로 달아 내렸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충격과 당혹감으로 지켜 보았을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은 그 같은 상황 속에서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이 행한 일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사건(事件)은 누가 복음에서 처음으로 복음서 저자가 사람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 사이의 직접적(直接的)인 연관성(聯關性)을 표현한 것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은 침상을 메고 온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침상에 누워있던 병자의 믿음까지도 가리키는 말이 되고 있다.

그 같은 점은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야고보도 그의 서신에서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를 믿음과 연결시키면서 “서로 기도하라”는 말로 중보기도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약 5: 15).

     예수님은 침상에 매달려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관심을 돌리시고, 그를 쳐다보시면서 먼저 그를 “이 사람아”라고 부르셨다.

모든 사람들은, 특별히 지붕 위에 있는 네 친구는.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실 것을 전적으로 기대하면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상 외로,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명한 그 병자의 문제와 필요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다.

우리는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이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게 여길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어렵고도 힘들게 찾아온 분명하고도 절박한 목적을 예수님께서 이해하지 못하신다고 생각하고 크게 실망했을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먼저 해결해 주시려고 한 인간의 더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와 필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들은 그 병자와 친구들의 반응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군중들 속에 앉아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반응은 즉각적이고도 분노에 가득한 것이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신성모독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며 “오직 하나님 외에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강하게 정죄하며 힐문하였다.

그들이 그 같이 강한 반응을 보인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선지자일지라도, “죄를 사하는” 권세가 없고, 죄를 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이 누가 죄를 사해주는지를 구체적으로 주장하지 않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으로 단순히 그 병자의 죄가 사함을 받은 사실을 밝히신 것이다.  

반면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의 죄를 사해준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종교지도자들의 생각과 책략을 아셨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같이 표현하셨을 수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였다는 것이다.

     1세기 당시에 유대교 내에서의 신성모독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그에 따르는 처벌에 대한 문제는 성경학자들이 계속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주제가 되고 있다.

하나님을 조롱하거나 부정(否定)하는 행위나 말은 신상모독이 될 수 있었다.   

고대 랍비의 일부 작품들은 율법에 대해 비방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신성모독 죄에 포함시키고 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문제로 삼은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한다고 하신 것과 하나님께 속한 명칭을 사용하신 일이 되고 있다.

한 예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자기는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이니라”고 하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신성모독을 한다며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 (요 10: 30 -33).

또 다른 한 예로, 예수님이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을 “그리스도”로 자백했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면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였다 (막 14: 61 -64). 

     본문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인해 “신성모독”을 했다고 믿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는 그들의 생각은 맞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바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사해주실 수 있으시다.           

 

누가복음 5장 22 -24절:

  •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누가는 예수님께서 그들 종교지도자들이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다 아시고 계신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생각을 아[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 종교 지도자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를 완전히 알고 계 셨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반문하시면서, 그들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질문으로 대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라고하셨다.

중풍병자와 같이 인간의 문제가 분명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는 것과 그 사람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지시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말하기가 더 쉽겠는가?  

말할 수 있는 면에서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외적 증거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는 모두가 그같이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즉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주 자신을 “인자”로 지칭하셨다.

예수님은 인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메시야로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아셨다 (눅 21: 27).             

순교 당하기 직전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는 설교를 할 때, 스데반은 환상으로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이를 묘사하였다 (행 7: 55 -56).

이 구절은 인자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특별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메시아로서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기를 원하였다.

아무리 많은 신학적 논쟁을 벌린다 할지라도 이들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주장을 납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만이 충분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다음, 중풍병자를 향하여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은 그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에게로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이 중풍병자는 치유를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와 친구들이 참 믿음을 행동으로 보였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의 가장 큰 필요인 죄 사함을 베풀어 주셨다.  

겸손한 마음과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 오면, 예수님은 기꺼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만일 당신이 그날 군중들 속에 있었다면,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행한 일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당신은 어떤 필요를 예수님께 가져오고 싶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믿음 (누가복음 5장 25 -26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 하셨을 때 그것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하였다.

군중들 가운데서도 그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또한 예수님처럼 죄를 사해주며 병을 치유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그 중풍병자가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 갔을 때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누가복음 5장 25 -26절

  •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었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라는 말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즉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그가 더 나아지는 것을 보려고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본문은 그 병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밝혀주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상태가 침상에 누워 사람들에게 메워 올 만큼 나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가는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는 짧은 말로,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이 기쁨과 감격에 차서 자기를 데려온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나머지 군중은 그 치유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누가는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이다.

‘영광을 돌리다’ 혹은 ‘찬양하다’라는 말은 누군가를 칭찬하고 그의 평판을 높이는 방법으로 그의 위대함을 확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 누가는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는 한마디 문장으로, 군중들이 말로 표현한 반응들을 요약하였다.

놀라운 일”로 번역된 말은 어떤 것이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 혹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군중들은 그들이 목격한 기이하고도, 경이로우며, 예상치 못한 사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당신은 중풍병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되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기:

  • 예수님은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소망(所望)을 주신다.
  • 예수님은 믿음으로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신다.     
  • 신자들은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당신은 소망이 필요한 사람들로 누구를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들에게 예수님과 그의 소망을 알려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이나 당신과 가까운 사람의 삶에서 놀라운 일을 하신 때에 대해 적어보십시오.  
그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당신이 이해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이 장년 성경연구 지도자 교재는 LifeWay에서 출간하여 보급하고 있는 Explore the Bible 교과과정의 학생용 한국어 교재를 가르치고 배우는데 도움이 되도록, 강 호길 목사가 LifeWay의 허락을 받아 영어 지도자 교재를 번역 및 편집한 것입니다.
그같이 허락한 LifeWay에 감사를 드립니다.
장년 성경연구 한국어 학생 교재는 LifeWay에서 주문하여, 장년 주일학교 시간에 혹은 목장이나 구역 모임에서 성경공부 교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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