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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성경연구 교사 교안

2019년 4월 28일 용  

 

9과  

 

 

섬기는 주로 오신 예수님  

 

 

학습구절: 마가복음 10장 35 -45절  

 

성경진리:

예수님은 자기 몸을 대속 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러 주심으로 겸손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다.   

 

주요교리: 전도와 선교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말의 전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의 참된 증거가 나타나는 방법으로 불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딤후 4: 5).

 

암송구절마가복음 10장 43 -44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slave of all.

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시작하는 글:

 

만일 고용주인 당신 회사의 사장이 새로운 부사장을 찾고 있는데, 그 후보자의 하나로 당신을 면접하려고 초대했다고 상상해 보자.

그래서 면접하러 갔더니,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에 면접하러 온 당신에게 빗자루를 주면서 회사의 복도를 청소하라는 것이 면접의 일부였다고 상상해 보자.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면접을 끝내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시대로 하기는 하겠지만,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차서 할 것이다.

겸손과 섬김의 가치를 깨닫고, 그 지시를 기회로 삼아 기쁜 마음으로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겸손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자신의 것보다 우선으로 삼는다.

 

구직(求職) 면접의 일부로 빗자루를 건네 받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당신이 취한 태도는 리더십에 대한 당신의 이해와 인식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본문배경설명   

 

마가복음 10장 1 -52절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들 중에서, 마가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그의 제자들이 믿음의 공동체로서 지속해 나가기 위해 배울 필요가 있는 것들을 골라서 기록하였다.

마가복음 10장에서 그 같은 것들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고 있다.

 

  • 결혼의 영속성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10 : 1 ~ 12)예수님의 새로운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결혼생활은 평생 동안의 약속과 헌신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10: 9).
  • 어린 아이들을 안수하시고 축복하신 예수님 (10: 13 -16).  믿음의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 심과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오는 자들만이 환영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어린이)의 것이니라” (10: 14).
  • 예수님과 부자 관원 (10: 17 -22).  부(富)는 종종 하나님의 왕국의 일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장벽이 된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10: 22).\
  • 소유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10: 23 -31).  예수님을 위해서 물질적인 부를 버린 사람들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10: 31).
  •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세 번째로 말씀하심 (10: 32 -34).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제자들이 그곳에서 직면하게 될 모든 것에 대해 그들을 준비시켜 주시고 계셨다 (10 : 32).
  • 고난과 섬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10 : 35-45).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 그의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들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쳐주심 (10: 46 -52).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마가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사역이, 지리적인 면과 시간적인 면에서 똑같이, 전환점이 되고 있음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자신의 죽음의 때가 가까워 오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갈릴리 지역을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셨다 (10: 1).

그들은,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10: 32).

예수님 일행은 여정의 최종 경우지로 “여리고”에 이르렀다 (10: 46).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계획을 실행에 옮기셨다 (11: 1 -11).

그러므로, 우리가 이 번 주에 학습하게 될 사건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동안에 일어난 것으로, 그의 마음에는 그가 곧 겪게 될 십자가의 고난이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학습구절 연구

 

제자의 요청 [마가복음 10장 35 -39절상]

 

1035절

  •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은 자기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 후 삼일 만에 살아나게 될 것을 세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밝혀주셨는데도 (8: 31; 9: 31; 10: 33 -34), 세베대의 아들로 알려졌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다가와서 그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이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예수님은 그 두 사람에게 그들의 요청에 따르는 높은 값을 고려해 보도록 도전하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원래 아버지와 함께 고기를 잡는 어부였다.

예수님이 부르시자 그들은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우레의 아들”이라는 뜻인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3: 17).

시몬 베드로와 함께, 그 두 형제는 예수님의 신임과 신뢰를 받은 최 측근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예수님과 함께하는 특권을 누렸다. (5: 37 -43; 9: 2 -8; 14: 33 -42 참조).

어쩌면 그 같은 일들로 인하여,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 특별한 요청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두 형제는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고 요청하였다.

흥미롭게도, 마태 복음은 두 형제가 특별한 요청을 하는 일에 그들의 어머니까지 동원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 20: 20-21 참조).

그러나 마가는 두 형제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두 형제는 다른 제자들과 떨어져 있는 예수님께 나아와 요청하였지만, 당시의 상황은 다른 제자들이 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마 10 : 41 참조).

두 형제는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다.

그 호칭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랍비’를 지칭하는 것으로, 영생을 얻기 원했던 부자 관원도 예수님을 그 호칭으로 불렀다 (10: 17 -18).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고백한 것처럼(8: 29),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도움을 청했던 많은 사람들이 한 것처럼 “주”라는 명칭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 두 형제는 맹목적으로 예수님께 “우리가 구하는 바”를 해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요구사항을 말하는 대신에,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먼저 받아내려고 하였다.

요즘 말로 하면, 그들은 백지 수표에 서명해 달라고 요구한 것과 같았다.

오늘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같은 생각을 가지고 용감하게 주님께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주권이란 우리가 그에게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예수님의 주권은 그 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가 하는 것을 뜻한다.

 

1036절

  •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그들 형제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말씀으로 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요구하셨다.

이 장의 뒷부분에서, 예수님은 맹인 바디매오에게도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말로 같은 질문을 하셨다 (10: 51).

시각 장애인은 육체의 시력이 회복되기를 원했는데 반해, 이들 형제는 훨씬 더 큰 것을 원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이 겸손하지 못한 것에 대해 즉시 책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대답하시기 전에 단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도록 요구하셨다.

예수님은 두 형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이 다시 말하기 전에 다시 생각해 보도록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들의 간청을 계속하였다.

 

1037 -39절상

  •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침례를 받으려니와  

조금의 부끄러운 빛도 없이, 그들 형제는 예수님께 그의 영광 중에 그들을 가장 높은 자리에, 즉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대담한 요구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고 있는 고난과 섬김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이 분명하였다.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있는 대적 자들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될 일이 임박한 것을 그들에게 경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로마를 몰아내고 다른 대적들을 물리 침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시키는 군사적이고도 정치적인 메시야에 대한 개념을 고수하고 있었다 (행 1: 6 참조).

형제들은 예수님의 통치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영광의 길은 십자가와 무덤을 통과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통치자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아있다는 말은 지위와 권력 및 명망(名望)을 나타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마음이 섬기는 일보다 개인적인 야망에 의해 더 강하게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냈다.

그들은 세상이 위대함을 정의하는 것같이, 위대해지려는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왕국이 예수님께 속한 것을 인정하였지만, 주님의 영광을 누리기를 원하였다.

예수님은 그들 형제의 요청에 도전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자신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의 전체 범위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영광과 성공과 승리의 미래를 상상하였다.

그들은 섬김과 고난과 희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그가 이제 겪을 일을 묘사하셨다.

그는 먼저 두 형제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성경 학자들은 “잔”이라는 말이 구약에서 기쁨과 넘침 (시 23: 5 참조) 또는 진노와 심판 (시 11: 6 참조)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을 종종 지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에 참 기도를 하시는 동안,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가 십자가에서 겪으실 고난을 가리키셨다 (14: 36). 

예수님이 사용하신 두 번째의 비유적 표현은 “침례”이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예수님은 그의 공 사역을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물 침례를 받으(셨다)" (1: 9 -11).

그 침례는 그가 앞으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고, 장사되었다가, 부활하실 것을 극적으로 상징하는 일이 되었다.

이제, 예수님은 그가 전에 받으신 물 침례가 상징하는 것을 실제로 겪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직접적인 질문을 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곧 직면하시게 될 고난과 죽음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많은 성경학자들은 잔을 마시고 물 침례를 받는 구체적인 이미지는 예수님이 믿는 자들에게 지키도록 요구하신 두 가지의 그리스도인의 의식, 즉 침례식과 주의 만찬과 관련된 동일한 이미지가 되고 있는 점을 지적해 오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맥락에서, 예수님은 그ㅢ 제자들이 지킬 의식이 아니라 그가 겪으실 불행한 일을 언급하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침례를 받거나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님은 참으로 고난의 홍수에 빠져 들었고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의 잔을 드신 것을 상기시켜 주는 구체적인 방법이 되고 있다.

더 나아가, 그 의식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값 비싼 대가를 치르도록 요구하시고 계시는 것을 상기시켜 주시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하였다.

어쩌면, 그들은 이제 그들이 증오하는 로마인들과의 전쟁이 일어날 것인데, 예수님이 그들을 부관으로 세우셔서 싸우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리고 아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나이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고난과, 가능하게는, 죽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답변  [마가복음 10장 39절 하  -41절]

 

1039절 하 – 41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침례를 받으려니와  
  • 내 좌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침례를 받으려니와”라는 말씀으로, 그들이 나중에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제자로 고난을 받게 될 것을 알려주셨다.  

예수님을 충성스럽게 따르려면, 그들은 고난의 값을 치르는 일이 요구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같이 하는 것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눅 14: 27).

사도 행전 12 장 2 절은 야고보가 예수님께 충성한 것으로 인해 열 두 사도 중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 행전은 또한 요한이 다른 사도들과 함께 붙잡혀 감옥에 갇히거나 채찍질을 당한 때를 기록하고 있다  (4: 3; 5: 18, 40).

그는 또한 예수님을 증언한 것으로 인해 “밧모라 하는 섬”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계 1: 9).

교회 전승에 의하면, 사도들 대부분은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았고, 어떤 경우에는 순교를 당하였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여전히 독특하고도 유일무이한 일이 되고 있다.

예수님 외에 아무도 죄가 없으면서도 인간의 죄를 위한 형벌로 고난을 당하거나 죽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는 말로, 결국 그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사람들이 있을 것을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그같이 중요한 자리들은 자기가 임명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그는 그 같은 자리에 선택 받은 신자들을 앉히는 것은 기꺼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맡기 셨다.

당시에 그들 “열 제자”는 두 형제가 요구하는 말과 예수님의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기 시작하였다.

“화를 내다”로 번역된 헬라어 용어는 일반적으로 잘못된 행동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일부 성서 학자들은 열 제자가 화를 낸 것은 의분(義憤)에서가 아니라, 시기심과 질투심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열 제자도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그같이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먼저 요청하는 것을 생각했기를 바랬던 것이다.

믿는 자들로서, 우리는 섬기는 일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원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고 있는가?

우리가 어떤 특권이나 보상을 받으려는 야심에서 섬기는 일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섬기는 유일한 동기는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되고 있다.

 

대속물이 되시는 예수님 [마가복음 10장 42 -45절]

 

1042 - 44절

  •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 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열 두 사도가 열띤 언쟁을 벌리고 있는 것을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셨다.

사도들은 새로운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될 것임으로, 그들은 함께 일할 때, 다른 무엇보다 겸손과 섬김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전에 제자들에게 이미 하나님의 왕국의 원리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그가 가르치신 상상수훈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마 5 -7장).

예수님은 한번은 제자들이 따라야 될 본으로 어린 아이를 세우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가르치시기까지 하셨다 (막 10: 15).  

여기에서, 예수님은 비교법과 대조법을 사용하여 제자들의 그릇된 태도를 바로잡아 주려고 하셨다.

예수님은 “너희가 알거니와”라는 말로, 먼저 이방인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권세를 부리는 (것)”을 상기시키셨다.  

임의로 주관하다”는 헬라어는 “지배하다” 혹은 “예속시키다”라는 뜻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어떤 말로 번역되든, 그 말은, 문자적으로든 혹은 비유적으로든, 자신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내리 누르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사람들을 그같이 대하는 사람은 교만과 오만이 그 특징이 되고 있다.

그 같은 집권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단지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이용가치로만 본다.

당시 제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던 이방인들은 약속의 땅을 점령하고 권세를 부리고 있던 로마인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방인 집권자들”과 “그 고관들”이란 말에는 집권자나 고관은 아니지만, 그 같은 권세를 가진 것처럼 행동한 일반 사회 혹은 종교 지도자들도 포함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지위나 권세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수단과 방법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 지니”라는 말씀으로 그가 가르치시려는 요점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밝히셨다.

그의 왕국은 전혀 다른 종류의 왕국으로, 그 왕국에서는 세상 지도자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는 관행들은 설 자리가 없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이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은 “크고자 하는 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새롭게 정의한 것이다.

열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말씀하시려고 부르시고 계신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들은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열두 제자들에게, 나아가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제자들이 그의 왕국에서는 윤리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규범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겸손과 섬김 그리고 희생이 생활 방식을 따라야 한다.

진정으로 크고자 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의 성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의 비교법은 “복음의 역설적인 진리”를 묘사해 주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섬기는 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diakonos’ 인데, 식탁에서 음식을 섬기는 자를 뜻하고 있다.

이 용어에서 ‘집사”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예수님은 또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종”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노예를 뜻하는  말로, ‘doulos’이다.

본래 그 말은 아무 권리가 없이 주인의 소유물과 같은 사람을 뜻하였다.

 

10장 45절: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섬기는 삶을 간략하게 요약함으로 섬기는 자가 되는 문제에 대한 권고의 말을 마쳤다.

그는 최상의 본을 보이신 분이 되고 있다.

  • “인자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가장 좋아하신 자신의 호칭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 용어는 여러 구약성경의 본문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특별히 다니엘서 7: 13 -14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거기에는 하늘로부터 “인자 같은 이”가 와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일이 묘사되고 있다. 예수님은 공회의 심문을 받으실 때 이 구절을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인용하셨다.
  •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는 말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대한 단호한 선언문이 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일반 통치자에 대한 인간의 기대에 반대되는 것이 되고 있다.
  • 도리어 섬기려 하고” 라는 말은 10장 43절에서 “섬기는 자”로 번역된 동사 형태의 명사가 되고 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 섬김의 본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 자기 목숨을 (주다)”는 말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기꺼이 자신을 죽음에까지 내어주신 것이 최상의 섬김의 행동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 까지 복종하셨(다)” 빌 2: 7, 8).
  • 대속물”이라는 용어는 신약에서 이 구절(막 10: 45)과 같은 내용이 되고 있는 마태복음 20장 28절에서만 사용되고 있지만, 그 용어는 일반 헬라어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그것은 노예나 전쟁 포로를 사서 자유를 주는 방법이 되고 있다.  
  • 많은 사람”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물로 이해하셨다.  “많은 사람”이라는 말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에 관한 이사야 53 장 11 절을 다시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확실히 여기서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이었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도 요한은 – 야심과 야망에 찬 말로 제자들 사이의 논쟁을 일으켰던 - 마침내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수십 년 후에, 요한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 16). 

 

말씀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기:

  • 신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드는 값을 계산해야 한다.
  • 신자들은 섬김의 동기를 점검해야 하며,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    
  •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심 없이 섬김으로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당신은 현재 당신의 삶 속에서 제자로서의 생활이나 믿음 생활에 대한 값을

어떤 방법으로 계산하고 있는가?

그것에 부족한 것이나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을 섬기려는 당신의 동기와 태도를 평가해 보라.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는 당신을 섬기는 자로 더 많이 보는가? 아니면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으로 보는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본을 따르기 위해 어떤 실제적인 단계를 취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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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관계를 위한 투자 - 제 13과 - 2020년 8월 30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아가서 5장 6-16절 강호길 2020.08.22 36
297 징계를 받아들이자 - 제 10과 - 2020년 8월 9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잠언 29장 1 -3, 12 -20절 강호길 2020.08.02 37
296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확신 - 제 7과 2019년 7월 14일 주일 용 -장년성경연구 교사용 교안 - 디모데후서 1장 3-14절 강호길 2019.07.09 47
295 세바의 반역을 저지한 다윗 - 제 10과 - 2018년 8월 5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사무엘하 20장 1 -2, 14 -21절 강호길 2018.08.01 50
» 섬기는 주로 오신 예수님 - 제 9과 - 2019년 4월 28일 주일 - 장년성경연구 교사용 교재 - 마가복음 10장 35-45절 강호길 2019.04.23 50
293 그리스도인의 시민권 - 제 12과 - 2020년 5월 17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로마서 13장 1 -14절 강호길 2020.05.11 50
292 하나님은 들으신다 - 제 7과 - 2020년 10월 18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이사야 37장 14-20, 30-35절 강호길 2020.10.11 51
291 연합하시다 - 제 3과 - 2019년 3월 17일 주일 - 장년성경연구 교사용 교재 - 마가복음 3장 23 -35절 강호길 2019.03.12 53
290 하나님은 행하신다 - 제 9과 - 2020년 11월 1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이사야 46장 3 -13절 강호길 2020.10.26 55
289 존경을 받다 - 제 1과 - 2018년 6월 3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사무엘 하 1장 22 -27절; 2장 1 -7절 강호길 2018.05.24 56
288 본을 보이는 교회 지도자들 - 제 3과 - 2019년 6월 16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디모데전서 3장 1 -13절 강호길 2019.06.13 56
287 책임이 따르는 삶 - 제 6과 - 2018년 7월 8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사무엘하 12장 1 -14절 강호길 2018.07.01 57
286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 다윗 - 제 8과 - 2018년 7월 22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사무엘하 15장 10 -16, 24 -30절 강호길 2018.07.14 60
285 하나님은 위임(委任)하신다 - 제 6과 - 2020년 1월 5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민수기 27장 12 -23절 강호길 2019.12.25 60
284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 - 제 1과 - 2020년 9월 6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이사야 1장 10-20절 강호길 2020.08.30 60
283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 - 제 8과 - 2019년 4월 1`일 주일 - 장년성경연구 교사용 교재 - 마가복음 15장 27-39절 강호길 2019.04.14 61
282 주님의 일에 힘쓰는 사역자들 - 제 9과 2019년 7월 28일 주일 용 -장년성경연구 교사용 교안 - 디모데후서 2장 14 -26절 강호길 2019.07.21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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